한순간 K가 아닐까 하고 재빠르게 돌아보았지만 당연히 그가 아니었다.
대학생이고, 한 2학년 되어 뵈는 여자였다. 기억의 데이터베이스를 빠르게 훑어보았지만 이렇게 생긴 사람은 없었다.
내가 묻기 전에 그녀가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오래전에 사진을 찍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민트라고 합니다.”
어디 보자. 민트, 민트, 민트, ……페퍼민트?
아니다. 페퍼민트라는 닉네임은 내 기억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냥 민트라는 닉네임을 쓰는 사람일 것이다. 시험 삼아서 물어보았다.
“좋아요. 그 혹시나 해서 말인데…… 고등학생이었나요?”
그녀가 쾌활하게 대답했다.
“네 맞아요. 그때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겨울이었을 테니까, 중학생과 고등학생의 사이라고 하는 게 맞겠죠?”
‘맞겠죠’ 라니, 그렇게 질문 형식으로 대답을 끝낸다면 나 역시도 할 말이 없다. 아마 고등학생이었던 거겠지. 언제 그녀와 만났는지도 이제는 기억에 없다. 대학생이면 지금으로부터 대략 6년 전 일이다.
나는 그때 처음 코스프레 촬영에 관심을 가지고 온라인 중고 마켓에서 백만 원짜리 DSLR 렌즈 세트를 구매했다. 그리고 트위터에서 촬영 사진사를 구하는 계정을 발견하면 같이 하고 싶다고 답글을 적었다. 정성스럽게 답글을 적으면 10건 중에서 아홉 건은 무시를 당하고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개중에 한두 건은 답을 받았다. 주로 팔로워 수가 수십 명에 그치는 작은 계정이었다. 남자하고 촬영할 때도 있었고 여자하고 촬영할 때도 있었다. 당시에는 일기를 쓰지 않았으니까 얼마나 많은 촬영을 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민트 씨’는 그 시절에 만난 사람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많은 것들이 베일에 쌓여 있다.
우선 학생식당으로 함께 들어가서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녀는 중학생 시절부터 코스프레를 해 왔지만 그렇게 인기가 있는 코스프레이어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전문적으로 코스프레를 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물론 이런 결심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이 필요했고,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그게 바로 나였다. 민트는 아래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당시의 일을 추억했다. 지금부터 하는 말들은 전부 ‘민트’에게 빚을 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나’의 기억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직구를 이용해서 구한 의상을 입어보고 싶었던 민트는, 트위터에 사진사를 구한다는 트윗을 올렸다. 나는 그녀의 트윗을 보고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고 답글을 달았다. 그리고 3월 모일에 우리는 잠실에 있는 한 스튜디오에서 만나기로 했다.
지금도 종종 그렇지만 버스가 서울에 진입하고 강남으로 들어오면 막히는 경우가 많다. 지방의 어느 소도시에 살고 있던 ‘민트’는 스튜디오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서 버스 티켓을 끊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정시에 도착해야 할 버스는 30분 늦어서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그녀는 바쁘게 움직였지만 3호선을 타야 될지 9호선을 타야 될지 고민하다가 그만 늦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9호선을 타고 갔다가 종합운동장 역에서 버스를 타고 스튜디오에 도착했더니, 이미 약속했던 시간보다 1시간이나 늦고 말았다.
“그런데, 하지만, 1시간 늦은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S님은 아무런 짜증도 없는 얼굴로 촬영을 시작하고, 그리고 무사히 끝났어요.”
그녀는 늦은 것에 대한 사죄로 스튜디오 대여 비용을 전부 지불하려고 했지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대여 비용을 반반씩 부담하는 것은 그대로 하고 대신 커피를 한 잔 사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약속한 대로 잠실역 근방에 있는 커피숍에 들어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모카 초코를 사 왔고, 나는 모카 초코를 마시고 그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역까지 10분 정도 되는 거리를 걸어왔다.
역까지 걸어가는 중에도 ‘나’는 그녀에게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약속 시간에 늦은 일을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고 다독여 주었다. 또 삼 년 뒤에 수능시험을 볼 민트에게 격려를 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저러해서 ‘민트’는 그때의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한 채로 고등학교에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고 한다. 이 대학교에 올 수 있었던 것도 다 S님 덕분이라면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그녀는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박사님은 오히려 나보다 더 내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 후에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는지 자세하게 캐 물었지만, 나와 민트는 동시에 “그런 일이 있었을 리가 없어요” 하고 대답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지 않나? 만약 민트가 다음 촬영을 의뢰했고 거기에 내가 긍정적으로 화답했다면 애초에 내가 그녀를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내가 선명하게 기억할 만큼 강렬한 추억이라면 민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나서 마침내 기억났다는 듯이 이러저러한 기억이 난다는 식으로 응답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혀 불러낼 수가 없는 기억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고, 우리는 점심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헤어졌다. 민트는 수업을 들으러 가야 된다고 그랬다. 박사님과 나는 다시 대강의실로 돌아가서 마지막 순간까지 자리를 지켰다.
학회는 저녁 일곱 시에 끝이 났다. 박사님과 나는 정문까지 같이 걸었다.
박사님은 마흔 살이 되기 전에 여자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그리고 대학생으로 가득한 캠퍼스에 오게 되면 언제나 괴롭다고도 말했다. 나는 박사님이라면 충분히 여자친구를 사귈 수 있다고 다독여주지 않을 수 없었다.
문득 생각난 것처럼 박사님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솔 씨는 뭘 하신다고 그랬던가요? 저번에 들었는데 그만 까먹었네.”
이제 슬슬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야 한다. 스마트폰을 가방 주머니에서 꺼내면서 재빠르게 대답했다.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영어학원에서 부원장으로 일합니다.”
“아, 그랬지. 솔씨도 우여곡절이 많았나 봅니다. 회사에 들어갔다가 영어 강사를 하다가 다시 회사에서 몇 년 동안 일을 하다가 다시 학원으로 돌아와서 부원장으로 일할 정도면. 아무튼 오늘도 즐거웠어요. 학회도 오랜만에 참석하니까 느낌이 새롭고 뭔가 새로운 연구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샘솟는 것 같아. 잘 들어가요.”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나는 대학생들이 캠퍼스의 바깥에서 캠퍼스의 안쪽을 향해서 보이지 않는 인력이라도 작용하고 있는 것마냥 썰물처럼 일정하지 않고 각자의 속도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보면서 그 속에 K가 있지는 않을까 하고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그러나 오전에 보았던 K의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어느 무리에서도, 캠퍼스의 어느 장소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고, 그것이 내가 예전부터 바랐던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처드 로티의 말처럼 인간의 삶을 설명하는 필연적인 어휘는 없다. 내가 만들어 낸 K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안심했다는 이야기 역시 하나의 가설, 우연적으로 하나의 순간에 주어진 어휘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서 기다리고 있는 장소가 우리가 약속한 바로 그 장소가 맞는지 확인했다.
아마도 맞을 것이다. 우리는 또 오페라를 보러 가기로 했다. 솔은 이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과 고전주의 오페라에 중독된 구제 불가능한 클래식 덕후다.
코스프레를 하지 않는 대신에 연주회장에 올 때마다 고딕풍 로리타를 입는 솔의 얼굴은 예전보다 훨씬 밝아진 것 같다.
내 얼굴이 밝아졌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장담하건대 신만이 알고 계실 것이다. 이제 나는 간절하게 운명이라는 이름의 신을 믿는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여신은 믿지 않는다. 둘은 언제나 다투지만 운명은 사랑에게 승리한다.
여전히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주말은 비워두고 있다.
누구를 기다린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