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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섬 게임에서 벗어나

다수가 이기는 게임을 위해

by 홍충희


금요일 저녁 친구들과 고깃집에서 술 한잔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삼겹살집 불판의 온기인지, 취기인지 모를 뜨끈함을 얼굴로 받으며 고기를 뒤적이고, 고소한 기름으로 흐트러진 속을 알싸한 소주로 씻어내는 와중 거나하게 취한 친구가 당신에게 묻는다.


'그 00동 사는 김복동이 알어~?'


어? 당신도 아는 사람이다! 이제 당신은 친구에게 그 사람을 알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자, 당신은 보통 어떻게 그 사람을 알고 있다고 증명하는가?


'아아~ 그 XX전자 다니는 사람 말이지?'


보통 이런 식이 아닌지?


예나 지금이나 평범한 개인 '김복동'씨를 떠올리고 설명하려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수많은 정체성 중 '직업'의 페르소나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 인간은 뭐 하고 먹고사는 인간인가?'


라는 것은 그 사람을 설명할 때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리고 조금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직업' 페르소나는 사람을 설명할 때 단순히 중요한 요소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의 대부분을 설명했다.


직업은 그저 생계수단이 아니었다. 과거 한국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직업 하나로 매력, 성실성, 인성, 취향 등 사실상 무관한 것들까지 함께 평가당해야 했다. 부모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 개인이 어떤 부모였는지는


'그 사람 아들은 의사고 딸은 판사잖아'


이 한 마디로 충분해졌다. 심지어 그 부모가 자식들을 무차별적으로 학대하고 존중 하나 없이 키웠던 인간들이라 하더라도, 자식들에게 제대로 된 직업 페르소나를 안겨준 부모라면 '다 너 잘되라고 그랬던 거야'라는 식으로 상당 부분 참작되었다.


그랬기에 과거 대한민국은 자식에게 제대로 된 '직업' 페르소나를 갖도록 부모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사회였다. 자식이 한국 사회에서 판단받는 거의 유일한 페르소나를 제대로 형태로 가지지 못할 경우, 자식이 겪게 될 천대와 무시, 그리고 자신이 견뎌내야 할 수모를 부모 입장에서는 버틸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직업' 페르소나는 한국에서 왕으로 군림하는 가치준거 그 자체였다.


그랬던 '직업' 페르소나가 흔들리고 있다.


직업 페르소나의 위기는 세대 갈등을 통해 그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세대 갈등은 어느 시대나 있어왔다고 한다. 기원전 1700년 수메르 점토판의 쐐기문자로도 '요즘 젊은것들은 버릇이 없다'라고 적힌 기록이 있다고 한다. 간혹 초등학교 6학년 짜리들이 교사인 나에게 '요즘 2학년 애들은 개념이 없어요'하는 소리를 하는 걸 보면 이 세대 갈등이라는 게 참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있는, 가장 본능적인 갈등 중 하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어떨까? 먼저 기성세대, 선배님들의 말씀부터 들어보면 이런 식이다.


'요즘 애들은 열정이 없어. 나 때는 회사에 라꾸라꾸 펴놓고...'


후배인 내 입장에서 봐도 내 세대는 과거 선배님들 같은 열정은 없다. 애사심은커녕 애국심조차 옅어지는 우리 세대에게 회사에 모든 열과 성을 쏟아붓는, 그런 열정은 찾기 쉽지 않다. 그렇다면 내 세대 이후의 인간들은 갑자기 어머니의 뱃속에서 '열정'이라는 것이 거세된 채 태어나는 종자들일까? 많은 인류학자들이 증언하듯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신체적, 심리적 특성은 기원전 5000년의 인간과 현대의 인간은 크게 다르지 않다. 기성세대의 할아버지의 고조할아버지의 증조할아버지를 데리고 와도 '요즘 것들'하고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얘기다.


결국 세대 갈등은 과거의 가치와 현재의 가치가 한 시공간에 모여 충돌을 일으키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가치가 있었으나 현재에는 그 가치를 조금씩 소실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직업' 페르소나다.


이 직업 페르소나의 위기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단어 혹은 현상들이 있다.


조용한 사직 (직장에서 적당히 월급 받고 최소한의 업무만 수행하는 상태)
N잡러 (한 직업에만 얽매이지 않고 여러 직업을 가진 상태)
파이어족 (직업이라는 것에서 최대한 빠르게 해방되려 하는 삶의 방식)


평생직장의 종말, 소셜 미디어의 발달, 양극화 심화, 공동체주의의 약화 등 직업 페르소나를 뒤흔드는 요소는 많을 것이나, 무엇이 원인이 되었든 직업 페르소나는 현재 한국에서 엄청난 위기를 맞이하였다. 물론 현재라고 아예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만큼의 위상을 보이지는 못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젊은 세대에서의 직업 페르소나의 가치는 기성세대가 받아들이는 가치보다 훨씬 가벼워짐에 따라 기성세대가 봤을 때는 젊은 세대가 직장에서 열정이나 책임감이 부족해 보이고, 반면 젊은 세대가 봤을 때 기성세대는 불필요하고 미미한 것에 목숨을 거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진짜 문제는 '직업 페르소나가 현재 무엇으로 대체되고 있는가'이다.


안타깝게도 현재 '직업' 페르소나를 대안으로 현시대를 지배하는 것은 더 건강한 방향이거나, 더욱 확장된 방향이 아니다.


이제는 떠오르는 페르소나는 '재산'이다.


예전에는 무슨 일을 하는가가 중요했다면, 요즘은 무슨 일을 하는가 보다는 결론적으로 그 사람이 얼마나 가진 사람인가로 변화했다. 결국 직업의 가치도 그 일을 통해 얼마의 재산을 축적할 수 있는가에 대한, 재산 페르소나의 수단으로써 평가된다.


8살짜리 꼬맹이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으면 대부분 그건 본인의 가치관이라기보다는 부모의 가치관인 경우가 많다. 기성세대의 아들딸인 우리들의 장래희망은 대게 의사, 법조인, 교사, 과학자 등등 직업 이름이었다. 요즘 아이들의 장래희망을 물어보면 '건물주', 내지는 '돈 많은 백수'라는 대답이 튀어나온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상상하는 것보단 더 현실감각이 없다. '선생님은 얼마 벌어요?' '얼마인지 맞춰봐~' 하면 어떤 아이들은 월 10만 원 받는다고 대답하는 아이가 있을 정도다. 어떤 아이들은 선생님이 학교에 사는 사람인 줄 안다.


8살은 당연히 현실감각이 없고 순수한 나이다.


그런데 임대인과 임차인도 구분하기는커녕 노동의 가혹함, 사회의 혹독함, 부조리는 알 수도 없는 8살짜리 꼬맹이들이 대체 어쩌다가 세상에서 가장 되고 싶은 것이 '임대 사업자'가 돼버린 걸까? 그들의 부모세대의 가치준거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건강하지 않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모두가 '남들보다 부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제로섬 상대평가의 몇 가지 퉁명스러운 기준을 따른다면, 일부만이 예외적으로 성공할 것입니다.

필즈상 수상자 허준이 교수님께서 서울대 졸업식 축사 중 하셨던 말씀이다.


제로섬 게임의 특징은 매우 간단하다.

승자가 있으면 반드시 패자가 있는 것.

이것이 제로섬 게임의 정수이자 핵심이다.


누군가가 승자가 된다면 반드시 비율적으로 패자가 생기는 게임이라는 특성상 제로섬 게임은 사회가 추구할만한 방향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사회의 규칙은 제로섬 게임이 지배하고 있는 중이다.


직업은 대표적인 제로섬 게임이다. 모두가 원하는 직업은 모두가 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선호도가 비교적 떨어지는 직업을 갖게 된다. '재산'은 어떤가? 보통 사람들에게 '부자'라는 것은 절대적 개념에 해당되지 않는다. 부자는 상당 부분 상대적인 개념이어서 부자로 불릴 수 있는 사람은 비율적으로 한정되어 있는, 제로섬 게임이다.


결국 우리는 하나의 제로섬 게임에서 벗어나, 또 다른 제로섬 게임으로 옮겨온 것에 불과하다. 직업으로 서로를 평가하던 사회에서, 이제는 재산과 소득으로 서로를 평가하며 똑같은 피로감과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행복에 대해 제로섬 게임의 규칙을 무차별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이 게임 속에서 일정한 비율의 개인은 끊임없이 패자로서의 패배감을 겪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필연이며, 수학적으로 명확하다. 그렇다면 사회는 이들에게 어떤 처방을 내리고 있는가? 이 제로섬 게임에서 탈진한 사람들에게는 괜찮으니 멈추고 쉬어보라고 토닥이는 진통제, 내지는 패배감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제로섬 게임에서 누구보다 노력해서 타인을 이겨보라고 소리치는 각성제가 처방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근원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결국 제로섬 게임의 논리 아래에서 우리의 내면은 원래 그런 것이라 서서히 자포자기하거나, 타인을 밟고서라도 행복감을 얻어보겠다는 이기감에 물들어 간다.


근본적인 질문으로 넘어갈 필요가 있다.


애초에 행복은 제로섬 게임일까?


행복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누군가가 행복하다고 해서 반드시 누군가가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행복을 재산, 직업, 커리어 등 소수만이 얻을 수 있는 것에만 기대기 시작한다면 제로섬이 아니었던 게임을 제로섬으로 만들어버리는 비극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원래 삶이 비극이라지만 우리가 개선할 수 있는 비극은 그래도 개선하기 위해 싸워볼 가치가 있다. 우리가 사회 전체의 제로섬 게임을 바꾼다는 이상적인 이야기는 어렵다치더라도 최소한 나 자신 안에서의 제로섬 게임은 끝낼 수 있지 않을까.


경쟁이 아닌 창조의 게임을 나의 내면 안에서 시작할 수 있다면, 이 게임이 내게 조금 더 높은 승률을 안겨주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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