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님' 하나로 버티기는 조금 위험할 수도 있다.
모자이크는 무작위 한 재료를 차근히 이어 붙여 하나의 무늬나 작품을 만드는 기법을 뜻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미술 기법 중 하나일 것이다.
어릴 적 모자이크 작품을 만들어 본 적 있는가?
형형색색의 색종이를 손으로 찢어 묵묵히 붙이다 보면 어느새 모양과 색이 일정치 않았던 무작위의 조각들이 하나의 종이 위에서 형용하기 어려운 형태와 색감을 가진, 멋진 작품으로 탄생한다.
그렇게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교실 뒤편 학급솜씨자랑에 전시한 뒤 옆에 전시된 다른 학우들의 모자이크 작품을 둘러보고 있노라면 단 하나도 같은 작품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게 어떤 모양이다, 어떤 색이다라고 형용하기도 어렵고 '민지 작품이 준형이 작품보다 낫다'식의 비교도 어렵지만, 아름답다.
인간의 마음도 이런 모자이크 작품과 같다. 정확하게는
인간은 페르소나로 이루어진 모자이크 작품과 같다.
페르소나는 아마 분석심리학의 거장 카를 융의 개념 중 가장 대중적인 개념일 것이다. 생소한 독자를 위해 간단히 소개하면, 페르소나는 인간이 사회로부터 잘 상호작용하기 위해 내보이는 일종의 가면을 뜻한다. 그리고 누구나 이 가면을 한 가지만 가지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어 똑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가정에서는 '엄격한', '아버지'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지만 기업에선 '자상하고', '부드러운', '부장님' 페르소나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단일한 조각이 아니다. 여러 개의 '페르소나'라는 색종이 조각들이 붙어 인간 '000'씨를 완성된다.
이 페르소나는 그 인간의 본성과는 별개로 존재할 때가 많다. 예시의 남자가 사실 본성은 엄격함에 더 알맞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요즘 부하직원들과의 소통을 위해 전략적으로 '자상함'을 선택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즉 인간은 자신의 본성과는 별개로 사회와의 유능한 상호작용을 위해 전락적으로 페르소나를 취사선택하며 살아간다.
여기서 인간의 필연적 고통이 시작된다. 카를 융은 가장 이상적이고 건강한 상태를 이 페르소나와 그 인간의 본성이 크게 괴리되지 않을 때라 말한다. 쉽게 말해 '내가 원하는 대로 나 자신을 보이고 행동하는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가?
'내가 업무지시에서 실수했지만 김 주임 선에서 그걸 알아서 잘했어야죠!'
라고 외치는 인간에게
'이런 썩을 놈이 지가 실수해 놓고 왜 나보고...'
로 시작하는 일갈을 내뱉으며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생사여탈권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장소와 업무일수록 자신의 자아보다는 페르소나를 강화할 수밖에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행동을 모두 내뱉고 행하며 살 수는 없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숙명이다.
그렇다면 이 숙명을 받아들이며 그저 살아야 할까?
그렇지 않다.
당신의 페르소나는 굳이 노동시간에 한정되어서 만들어질 필요가 없다. 여가 시간을 통해 충분히 다른 페르소나로 당신이라는 모자이크 작품을 꾸미며 살아가면 된다.
아이들의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작품의 미추를 떠나 불안한 작품은 있다. 미술시간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아이들이 만든 작품 중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모자이크에 쓸 색종이를 대충 상추쌈처럼 크게 크게 턱턱 찢어 붙여버리곤 3분 만에 '다했어요'를 외치는 아이들의 작품 말이다.
이 아이들의 작품은 아름다움과는 약간은 거리가 생길뿐더러 유지보수 측면에서도 불안하다.
다른 아이들의 모자이크는 시간이 지나 풀이 다해 몇 조각이 떨어져도 여전히 아름다운 작품으로 남아 있지만, 상추쌈 같은 종이 조각으로 완성한 아이들의 작품에서 한 조각의 종이가 떨어져 버리면 휑한 빈 종이만 덩그러니 남을 뿐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하게 어떤 이는 이 종이 조각을 너무 크게 붙이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직업 조각, 재산 조각, 엄마 조각, 아빠 조각 등 자신이라는 모자이크 작품을 소수의 페르소나만으로 완성하려고 한다.
이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충분히 커다란 크기의 직업 조각과 재산 조각 등을 얻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며 급변하는 사회에서 설령 적당한 조각을 얻었더라도 그 조각이 영원히 붙어있을 확률은 적으며, 십분 양보해 그 조각이 영원히 붙어있더라도 스케치북을 뒤덮을 만한 한 조각의 색종이로 완성하는 모자이크의 아름다움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인간상을 제안하고자 한다.
바로 '모자이크형 인간'이다.
직업이나 재산이라는 거대한 단일 조각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대신, 의식적인 설계를 통해 다채로운 '페르소나' 조각들로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완성해 나가는 사람들.
이들의 삶은 제로섬 게임에서 벗어나 있다. 이 모자이크에는 정답도, 순위도 없다. 오직 어제의 나보다 더 풍요롭고 다채로운 작품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의 즐거움만이 존재할 뿐이다.
모두가 비교가능하여 줄 세우기 용이한 게임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자이크 작품이 되는 것이다. 이들은 비교도 어렵고 줄 세우기도 어려우며 무엇이라 형용하기 어렵지만, 자기 나름의 아름다움을 각자가 뽐내며 살아가는 창조의 게임.
이것이 다수가 이길 수 있는 게임의 플레이어, 모자이크형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