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가가 답일 수 있다

범인은 당신의 저녁 시간일수도 있다.

by 홍충희

현대인의 마음은 꽤나 위태롭다.


현대인들은 성과로 거의 모든 것이 판단되는 가치준거 속에서, 재물이나 명예처럼 모두가 가질 순 없는 것들을 한 줌이라도 더 얻기 위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착취하고 몰아붙인다. 큰 재물과 높은 명예를 가지지 못한 자는 스스로를 패배자로 여기며 자기 자신에 대한 가치를 평가절하하며 살아가기 쉽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모자이크형 인간이 되어야한다. 재물, 직업 등 제로섬 게임의 승자가 되어야만 이루어낼 수 있는 페르소나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더욱 다양한 페르소나를 확보하여 자아와의 괴리를 극복하고 회복탄력성을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더불어 '페르소나'라는 마음의 음식 안에는 풍부한 '마음의 영양소'가 듬뿍 들어가 있을 수록 좋다. '마음의 영양소'는 자율성, 유능성, 관계성(이하 자.유.관)이 있으며 스스로 만들어가는 페르소나 안에 이 자.유.관이 골고루, 충분히 들어가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인생에 '몰입'을 경험하고 평범한 존재가 아닌 한 차원 더 높은 존재로 들어가보는 경험을 나 자신에게 계속 제공해주어야 한다.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행동하고, 자신의 유능한 능력을 이용해 주어진 과업을 노력과 몰입을 통해 완수해내며, 친구,연인,지인 등 나에게 의미있는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고 인정받으며 존중받는 사람. 그리고 이러한 페르소나를 여러 개 보유하고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이상적으로, 이론적으로 이 과정은 인생 전반에서, 특히 일에서 일어나면 좋다. 보통 직장은 인간의 하루에서 8~9시간정도를 차지한다. 물리적으로도 인간의 하루에 큰 비중이며, 특히 생사여탈권과 관계되었다는 측면에서 자연스레 다른 시간보다 인간의 마음 건강에 좋든 나쁘든 큰 영향을 끼친다.


직장에서 마음의 영양소를 듬뿍 섭취하는 페르소나를 가진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엄청난 행복 선순환이 그 사람의 직장 생활 안에서 펼쳐질 테니. 마음의 영양소를 직장에서 충분히 섭취하는 사람은 직장에서 자.유.관을 느끼니 월급과는 크게 상관없이(!) 몰입과 열정을 직장에 쏟아부을 것이다. 성과에 대한 금전적 보상과 더불어 비교적 업무에서의 자유도를 보장받을 기회가 더 많아질테고 자기가 맡은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과정에서 유능감을 느끼고 직장 상사, 부하직원 등에게 인정과 지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행복한 직장 생활을 보내기는 어렵다. 아마 고단한 직장인이라면 위에 있는 문단에 현실섞인 조소를 보냈을 지도 모르겠다. 직장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가. 자율성, 유능감, 관계성을 충만히 느끼기 쉬운 곳인가.


직장에서 나의 자율성을 떠올려보자.


"좋은 의견인데, 일단 위에서는 이렇게 하라고 했으니까 그냥 따르자."

"다음 주 월요일까지였던 기획안, 사장님이 오늘 보고 싶으시데. 오늘 저녁까지 가능하지?"

"이유는 묻지 말고, 그냥 일단 해봐. 다 위에서 생각이 있어서 시키는 거겠지."


회사는 상사의 지시, 정해진 마감시간, 클라이언트의 요구, 회사의 목표 등 개인의 자율성이 좀처럼 보장받기 쉽지 않은 곳이다. 그렇다면 유능감은 얻기가 쉬울까.


"음... 다 좋은데, 좀 더 샤한데 빵! 한 거 없을까."

"김 대리는 벌써 다 끝냈던데, 복동씨는 아직 하고 있어? 좀 서둘러야겠네."

"이거 중요한 거니까 일단 내가 마무리할게. 복동씨는 다른 거 먼저 하고 있어."

"수고는 했는데, 내가 예전에 해봐서 아는데 그런 방향성으론 막힐 걸."


'유능하다'는 꽤나 수치적으로 정해지며, 개인이 느끼는 주관적 유능감과 회사가 목표한 바는 아예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내가 봤을 때는 잘했어도 회사가 내 결과물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유능감은 허울로 그치게 된다. 관계성은 어떨까? 그래도 하루 대다수를 보내는 직장동료는 개인의 삶에서 꽤나 '의미있는 사람'들이다.


"복동씨는 사람이 참 착해. 이런 귀찮은 일도 싫은 내색 없이 다 해주고 말이야."

"나니까 복동씨한테 이렇게 쓴소리해주는 거야. 다 애정이 있어서 그러는 거 알지?"

"이건 아직 오피셜은 아닌데... 곧 있을 승진 말이야..."

"어이 김 대리, 이사님 지금 기분 안 좋아 보이시는데, 센스있게 믹스커피 말고 1층 카페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샷 추가해서 좀 사 와. '김 대리가 이사님 힘내시라고 사 왔습니다' 하면서 드려. 이런 게 사회생활이야."


직장은 관계성의 두 가지 축인 '의미있는 관계'와 '따뜻한 상호작용' 중 후자가 어려운 곳이다. 직장에서 주고받는 상호작용은 '따뜻한 상호작용'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상호작용'인 경우가 잦다. 직장에서 만나는 타인과는 상당히 수직적인 관계를 맺게 되고 서로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여, 지지, 인정, 존중을 주고받기보다는 행간이 존재하는 언행들, 지켜야할 예절과 의전, 암묵적인 집단의 규칙, 목적이 존재하는 아부 등이 오가기에 진솔하고 인간적인 유대감을 쌓기가 어렵다.


무엇보다 직장이라는 환경은 내가 적극적으로 바꾸기가 어렵다. 다른 부분에서는 이 모든 것이 마음에 안들면 바꾸면 되지만, 직장에서 그게 가능한가. 직장에서 마주하는 일감, 성과, 구성원은 내가 컨트롤할 수가 없다. 따라서 운이 좋게 자.유.관을 섭취하는 직장에 다니고 있다면 너무나도 행운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마음 한 켠에는 작든 크든 마음 영양의 결핍을 느끼며 살아가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렇다면 여가 시간은 어떨까?


여가는 내가 적극적으로 조정이 가능한 시간이라는 점에서 직장생활과 질적으로 다르다.


적극적으로 환경을 통제할 수 있기에 직장에 비해 압도적인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다. 자율성을 발휘하며 도전하고 싶은 것에 마음껏 도전하면 그 자체로도 유능감의 트리거가 된다. 더불어 직장과는 달리 유능감을 느끼기 위해 금전적 보상이나 타인의 평가가 필요치 않다. 오로지 '어제의 나'와 비교하며 자신의 순수한 성장감을 만끽할 수 있다. 여가시간에 확장할 수 있는 인간관계에는 이해관계가 적다. 그 속에서 정치적이고 무거운 상호작용보다는 따뜻하고 진솔한 관계를 맺을 가능성도 훨씬 커지는 시간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가 시간을 영양 보충의 시간으로써 적극 활용할 수 있다. 'XX전자 김복동 주임'으로의 페르소나만으로 당신의 자.유.관을 채우지 못했다면 이를 여가 시간에 다른 페르소나들로 채워나가 마음 건강 상태를 개선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여가 시간을 적극적으로 조정하는 사람은 드물다. 현대인의 신체와 정신의 건강을 흐뜨리는 원인은 단 하나. 욕망이다. 인간은 욕망에 취약하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건강한 식단이 무엇인지 알고있다. 형형색색의 채소와 가금류, 생선, 콩, 통곡물 위주의 소박한 식사. 두바이초콜렛을 올린 크로플같은 것은 가끔먹어야 건강하다는 것도 머리로는 알고있다. 그러나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어렵다. 직장이라는 공간이 주는 마음 영양 결핍이 인간에게 거대한 보상 심리를 안겨주기 때문이다. 저녁 시간을 달콤한 음식과 자극적인 음식, 소모적이면서 즉각적인 활동들로 채우며 지친 내 몸과 마음을 보상하려 한다.


이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성과지향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의지력은 종종 과대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의지력이란 생각보다 약하다. 거대하게 밀려오는 보상심리나 호르몬의 작용, 인간의 욕망을 교묘히 파고드는 거대 자본의 상품 설계력 등은 인간이 어찌 통제할 수 없는 범위 밖에 있는 것이다.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돌아온 집에서 OTT 예능 한편 틀어놓고 시원한 맥주 한 잔에 고소한 치킨 한 마리를 뜯는 것은 어찌보면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태라고까지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부를 악순환은 분명 인지해야한다. 신체 건강은 물론이거니와 정신 건강에서도 이러한 현대인의 생태는 악순환을 부르며, 애초에 신체와 정신은 분절되어있지 않다. 정신 건강이 망가지면 신체건강이 망가지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더 낮아진 체력과 회복 탄력성은 더욱 사람을 비활동적으로 만들며 비활동적인 생태는 더더욱 낮아진 체력과 회복 탄력성을 보장할 뿐이다.


마음의 영양 측면에서는 어떤가. 당신의 그 짜릿한 저녁 시간이 당신의 마음에 자율성, 유능감, 관계성을 선물하는가.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몰입, 로버트 헨리의 '평범한 존재에서 더욱 높은 차원으로 존재하는' 순간을 선사하는가. '행복'의 정의가 불행에 대한 보상심리와 원초적 쾌락의 충족인가.


그렇지 않다는 걸 당신도 알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자연스러운 욕망과 허무한 악순환 앞에서 그저 좌절해야만 할까? 아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인간의 의지력은 생각보다 약하지만, 인간의 적응력은 매우 뛰어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의지력이 아니라, 조금 더 현명한 시간 분배, 환경 설계와 환경 변화를 실행하는 결단력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우리가 '여가 포트폴리오'를 세워보아야 하는 이유다.

휴식은 어떤 식으로 영위하면 좋을 지, 취미는 어떻게 영위하면 좋을 지 최소한의 가이드를 알아보고 한정된 저녁시간과 환경의 현명한 배분인 '포트폴리오'를 통해 지쳐있는 당신의 마음이 진짜 원하는 영양소를 섭취해야한다.


'포트폴리오'라는 단어가 주는 압박감은 잊어도 좋다. '여가 포트폴리오'는 당신에게 무언가 해내고 이루어보라고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좀 더 편안한 휴식, 좀 더 재밌는 일상, 좀 더 행복한 인생, 건강한 몸과 마음 같은 것에 비하면 성과나 성취 따위는 도구에 불과하다.


인생의 다채로운 즐거움을 위해 '여가 포트폴리오'를 함께 설계해보자. 당신은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다.



keyword
목요일 연재
이전 06화마음의 영양 실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