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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곤두레밥 Nov 28. 2023

선지국이 하얗네?

빨간 선지국 먹고싶다

이전 글에도 언급한 적 있듯이 나는 경남의 해안도시 출신이다.

그리고 중부지방으로 조금 올라와 교사 생활을 영위 중이다.


중부지방에서의 생활은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편이어서

내키는 주말이면 서울로 올라가 연극을 볼 수도 있고, 겨울에는 생전 가본 적도 없는 스키장에 스키를 타러 가기도 하며, 서해 바다로 달려가 가리비를 숯불에 잔뜩 올린 채 구워먹는 호사를 가끔 부리기도 한다.


경남에 살던 때에는 쉽게 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러나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음식,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우리 지역식으로 조리된 향토음식에 대한 그리움이다.


정말 경상도와 중부지방은 음식의 차이가 있다. 




전국적으로 다들 비슷하게 먹으리라 지레짐작한 음식이 사실은 지역별로 상이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충격을 당신은 겪어본 적 없는가?


모두가 이렇게 먹을 것이고, 이런 식으로 즐길 것이라고 생각했던 음식이 실은, 우리 지역만 이렇게 먹거나 지역 별로 상이한 방식으로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가벼운 충격.


이미 유명하게 알려진 음식 차이들도 있다. 순대는 소금, 쌈장, 초장파들로 나뉘고 김치는 남쪽으로 갈수록 젓갈 덕택에 짜고 쿰쿰해지며 경상도식 소고기국이나, 전라도식 상추튀김이 있다 등의 차이점들은 이미 전국적으로 알려져 충격을 크게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미디어에서 지역의 모든 차이점을 담을 수 없는 법.


따라서 고향을 떠나온 타향민은 으레 우리와는 다른 음식에 대한 이질감을 종종 받으며 살 것이다.


당신은 타향민으로서 어떤 음식에서 처음 충격을 받아보았는가?






나에게 처음 타향민의 충격을 준 음식은 바로 선지국이다.


대학생 시절, 동기들과 밤새 놀다 새벽녘까지 영업을 하는 해장국집을 들어가 아주 이른 아침을 먹기로한 어느 날이었다. 메뉴판을 살펴보니 순대국, 뼈다귀해장국, 내장국밥, 선지해장국 등이 으슬한 새벽의 바람에 싸늘해진 몸을 뜨끈히 데워 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시장통에서 먹는 선지국이 생각나 선지국밥을 주문했다. 


몇 분의 수다와 기다림끝에 받아든 선지국을 보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앞에 놓인 선지국이 지금까지 내가 먹어본 선지국과는 굉장히 달랐기 때문이다.


선지국밥에 무슨 그 정도로 충격을 받냐 싶을 수 있겠지만, 나에게도 항변의 이유가 있다.

일단, 내가 지금껏 먹어본 선지국과 중부지방의 선지국은 달랐던 것은 둘째치고 난 선지국이 지역마다 조금은 다르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어릴 적 오일장에 어머니의 손을 꼭 쥐고 걷다보면 매콤하면서 비릿한 선지국의 냄새가 진동을 했고, 허름한 천막에 들어서면 푸근히 미소를 짓는 사장님이 검정 그릇에 한그릇 3천원 짜리 선지국을 담아주셨다. 


플라스틱 의자와 파라솔 구멍이 뚫린 테이블에 앉아 밥을 말고는 후르릅 숟가락을 입속으로 찔러넣으면, 선지의 약간 비릿하고 퍽퍽한 맛을 눌러주는 후추의 향과 채소의 아삭한 식감, 미원이 팍팍들어간 국물의 감칠맛이 느껴졌다. 


'쪼매난 아가 슨지꾹을 물 줄 아네예'하는 사장님의 촌스런 칭찬이 떠오르는 그 풍취까지 내게 묻은 음식.


내가 지금껏 먹은 선지국은 경상도식 소고기국 내지는 육개장에다가 선지를 썰어넣은 느낌의 국밥이었다. 고추기름이 살짝 뜬 빠알간 국물에 대파와 후추가루가 팍팍 들어가있고 고사리, 토란, 콩나물 따위가 식감을 더해주는, 얼큰하고 짜고 자극적인 맛이 굉장히 지배적인 장터 선지국이 내게는 '선지국'이다.


그러나 내 앞에 도착한 선지국은 조금 달랐다. 



내 선지국은 이렇지 않아...!!!!!!!!! 



된장을 주로 쓴 희고 맑은 국물에 삶은 우거지와 파가 올려져 있고 내 기준에서는 '된장국'에 가까운 무언가가 앞에 놓인 것이다. 썰어진 선지만이 내게 이것은 추어탕이 아니라 선지국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근거였다. 그 선지만 아니었더라면 '저 추어탕 안시켰는데요?'라고 항변할 뻔 했을 정도로 이 곳의 선지국은 달랐다.




기대했던 맛이 아니라서 그랬을까? 20대 초반, 맘스터치의 싸이버거를 3개씩 집어삼키던 나는 조그만 옹기그릇에 뜨끈히 담겨져나온 맑고 담백한 선지국을 몇 술 뜨지도 못한 채 쓸쓸히 식사를 끝 마쳐야 했다.




타향민으로서 내 고향과는 상이한 이 지역의 음식을 보았을 때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 일 것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 듯이 이 곳의 조리법에 순응하고 맛있게 먹거나, 이 곳의 방식을 인정하지 않고 그 음식에 관해선 영원히 이방인으로서 남거나.


나는 왠만한 음식에 관해서는 로마의 법을 따르고 있다. 


이런 방식도 참 매력이 있고 맛있고 저런 방식도 참 신기하고 맛있더라. 더불어 내가 이제는 여기에 살고 있으니 이곳의 입맛을 따라가야함은 이 지역에 대한 존중이고, 도리이자 예의이기도 하지 않는가.


그런데 선지국에서만큼은 아쉽게도 고향을 떠나온 10년의 세월 동안 아직까지 이방인으로 남아있다.


오늘은 날이 흐리다.

빨간 선지국이 문득 생각난다.


제기럴, 이 선지국 녀석은 영원히 나를 이방인으로 만들 셈인가보다.



사진출처: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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