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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찔찔이 Dec 07. 2023

4. 문이 열리네요. 그대가 들어오죠. 첫 눈에 난..

대머리 아저씨와의 소개팅에서 냉동난자까지, 나의 모태솔로 탈출 분투기

 서로의 집 중간에서 보자던 소개팅 상대 족제비 씨는 동네에 아는 카페가 없다며 내게 첫 만남의 장소를 정해달라 했다. 돌솥밥이 찰지고 맛난 기사식당들이 가득한 구수한 우리 동네에 딱 하나 자리 잡은, 조명이 어둑하고 우아한 음악이 나오는 작은 카페가 떠올랐다. 분위기가 좋으면 자연스럽게 식사로 연결될 수 있는 나른한 주말 오후 네시, 우리는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늦게 연락이 온 터라 마음이 조급했기에 바로 그 주 주말로 약속을 잡았지만 당시 나는 업무가 상당히 바쁜 시기였다. 금요일 퇴근길, 코앞으로 다가온 소개팅을 떠올리고 새 셔츠를 한 장 샀다. 가을의 초입이지만 여전히 더위가 꺾이지 않았기에 유행하는 푸른 셔츠로 시원하면서도 세련된 이미지를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화장을 하고, 몇 번이고 머리를 매만지고 집을 나서는데 아직 3시였다. 약속장소는 집에서 3분 거리지만 도저히 집에서 가만히 기다리기가 어려웠다. ‘혹시 테이블이 적어 자리를 잡지 못하면 어쩌지?’, ‘카페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장소를 급히 바꿔야 하면 어쩌지?’ 같은 별의별 걱정을 하며 3분 거리의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손님은 나 하나였다. 일행이 오면 주문할게요,라고 말하려다가 한 시간 뒤에야 오겠구나 싶어서 디카페인 커피를 한 잔 주문했다.


  어떤 사람일까, 무슨 이야기를 할까, 김박사가 어련히 좋은 사람 소개해줬겠지. 입이 마를 때마다 조심스럽게 한 모금씩 커피를 마시는 사이 45분이 훌쩍 지나갔다. 그가 조금 미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급히 커피잔을 반납하며, “일행 오면 한 잔 더 시킬게요” 말을 하고는 온도차로 테이블에 어린 약간의 습기를 닦아내며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긴장하지 말자.‘ 그러나 약속시간이 다가오자 심장이 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4시가 되었다. 그전에 카페로 들어오는 남자들이 둘이나 있었지만 뭔가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그가 들어왔다.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게 없었지만 문이 열리자마자 그가 나와 약속한 족제비라는 것을 알았다. 마치 노래 가사처럼. ‘문이 열리네요. 그대가 들어오죠. 첫눈에 난’ ~ 알아차렸다. 아, 저 사람이다! 탈모 진행 정도가 누가 봐도 40대 중반 오늘의 소개팅남이었다.


 그는 나를 보며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걸어 들어왔다. 그쪽도 한 번에 오늘의 소개팅녀를 알아본 것이다. 그 시각 우연히도 카페 사장을 포함에 가게에는 모두 남자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지인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그는 오미자 에이드를 나는 따뜻한 홍차를 주문했다. 아이스를 주문하려다가 원샷을 때릴까 봐 불안해졌기에.


 음료가 나오기 전 어색해서 테이블만 바라보다가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들어 그를 살짝 바라보았다. 은근한 향수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아 이 향기는? 2000년대 초반 길거리를 거닐 때 한 번쯤은 맡아본, 쿨워터향 아닌가? 그 순간 나는 쿨워터향과 함께 혼미한 시간여행을 시작했다.


  그의 첫인상은 익숙하면서도 어색함이었다. 익숙함은 쿨워터향 같은 것이다. 그의 모든 것이 2000년대 같았다. 당시에는 훈남 아니 흔남들도 모두 그러고 다녔다. 통이 좁은 바지, 정수리부터 왁스로 세운 머리, 작은 링귀걸이까지. 어쩌면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시간여행자가 아니었을까? 할 정도로. 어색함은 주변에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익숙함에 나도 모르는 새 설레고 있었다. 멈추고 싶었지만 그 시절 내가 해보지 못한 것이 연애여서 그런가 시간여행자에게 자꾸 마음이 열렸다.


 무슨 일을 하는지, 왜 그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 선택에 후회는 없는지, 활동의 동기는 무엇인지. 말이 잘 통했다. 술을 좋아하는 것도,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가 <나의 아저씨>인 것도. 떨리는 마음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렀다. 우리는 술 한잔을 하기로 했다. 카페를 나서기 전, 음료를 두 잔이나 마신 나는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

  아뿔싸. 거울을 보니 내 겨드랑이가 울고 있었다. 긴장과 들뜸으로 흐른 땀이 푸른 셔츠를 촉촉이 아니 흥건히 적셔놓았던 것이다. 그가 눈치챌 수밖에 없는 정도였다. 혼미한 상태로 그와 밖으로 나왔다. 아직 바깥이 밝다는 사실이 나를 절망케 했다. 분명 절망은 걷잡을 수 없는 땀으로 돌아오리라! 안 되겠다 싶어서 나는 그에게 말했다. “보시다시피 제가 지금 꼴이 이래서, 정말 죄송하지만 여기 잠시만 서 계실래요? 5분이면 돼요.”


 그는 알겠다고 했다. 길가에 그를 멀뚱이 세워놓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달려갔다. 셔츠를 벗어던지고 눈앞에 보이는 검은 반팔티로 갈아입었다. 거울을 보니 화장도 살짝 번져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 앞에서 만난 것도 이 순간을 위해서일까? 신이 내편이라면. 아냐, 그가 도망갔으면 어쩌지? 에라 모르겠다. 가도 할말없지......’


 고맙게도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마음이 편해졌다. 눈치 없이 날뛰던 심장도 가라앉았다. 그렇게 우리는 술을 마시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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