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물 이슈 + 영어 이슈 = 최악의 여행

어느 X세대의 여행산문집 사서고생기(2018 중국, 아르메니아)

by 렐레

한 달 살기 좋은 나라로 태국의 치앙마이를 예로 많이 든다. 나도 언젠간 한달살이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사실 어디가 중요한가. 회사를 한 달 안 갈 수 있다면 그냥 집구석에 콕 박혀있어도 좋을 거 같긴 하다.


여하튼 어디로 여행을 가볼까... 검색을 하다가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가 한 달 살기 좋은 나라로 뜨고 있다길래 나중에 한 달 살기를 하게 될 경우를 대비해 사전답사 겸 조지아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커피로 유명한 곳'

이것이 내가 아는 조지아의 전부였다. 하지만 여행준비를 하다 보니 그것마저 틀렸더라.

커피로 유명한 조지아는 미국의 조지아주이고 내가 가는 조지아는 코카서스(캅카스) 산맥 남쪽에 위치한 세 나라인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세 나라 중 하나이다.

보통은 멋진 자연과 저렴한 물가를 내세워 이 세 나라를 엮어서 여행하는 경우가 많다.


난 한국에서 가는 직항도 없고 여행 일정이 10일뿐이라 아제르바이잔을 제외하고 조지아, 아르메니아 두 나라만 방문하기로 했다. 왕복으로 베이징을 경유해야 하니 세 나라나 매한가지군.




<사건의 추이>

21일 2시

여행 첫날, 인천공항에서 밤 12시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으로 갔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예약한 숙소에 도착하니 새벽 2시 15분.

공항 근처 숙소라 그런지 북킹닷컴 사이트에 호텔 리셉션이 24시간 운영된다고 명시되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너무 늦게 도착하는 게 불안해서 새벽 2시 넘어서 도착한다고 미리 메일도 보내놨는데 체크인을 하려다 보니 너무 늦어서 방이 없단다.


What the...


"난 메일을 보냈다."

"난 못 받았다."


어플로 메일 보낸 내용까지 보여줬지만 그건 북킹닷컴 잘못이란다.


내가 아무리 영어를 못해도 그렇지 호텔직원인데도 영어가 너무 안 통한다.

그는 한글이긴한데 뭔 말인지 알 수 없는 번역기 화면을 나에게 들이댔고

나 역시 파파고에 쓰고 또 보여주고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며 실랑이를 했다.


이 시간에 다른 숙소를 잡는다는 건 무리였다. 그냥 밤을 새워야 하나...

결국 새벽 3시까지 신경전을 벌이다 좀 더 비싼 방에 묵기로 하고 겨우 들어왔다.




21일 3시

시작부터 너무 힘들다.

맥주 없는 여행을 상상할 수 없는 우리는 새벽 도착해서 여행 첫날 뒤풀이를 해야 한다는 일념하에 캐리어에 맥주를 챙겨 왔다. 새벽이라 마트 문 안열까봐. 맥주에 한해서는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는 나다.

일단 방에 들어왔으니 서로의 노고를 치하하며 가볍게 맥주 한잔하고 자자고 남자 친구 캐리어를 열었는데...


What the(2)...

다른 사람의 가방이었다.

문제가 해결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른 사건이 터졌다.

피곤하다.




21일 9시

아침을 먹고 다시 베이징 공항으로 향했다. 항공사 카운터가 아닌 사무실을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공항을 헤집고 다녔는지 모른다. 대한항공 안탔으면 어쩔뻔했냐. 겨우 찾아서 들어간 사무실에서 말이 통하는 한국사람을 만나니 반갑고 서러운 마음이 왈칵 들었다.


우린 비행기에서 늦게 나와 수화물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캐리어를 주워왔을 뿐인데 누가 우리 가방을 가져간 게 분명하다며 당장 내일 예레반(아르메니아의 수도)으로 가야 하는데 우리 가방 좀 찾아달라고 하소연했다.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들어간 직원은 다행히 가방 바뀐 사람이랑 연락이 됐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바로 못 오고 오후 5시나 돼야 올 수 있다고 했다고 5시에 다시 오란다.


아.. 또 와야 하는구나..

나도 오늘 일정이 있는데..

아무튼 5시에는 찾을 수 있다니 다행이라며 긍정회로를 돌리고 원래 계획대로 자금성으로 향했다.


P9210012.JPG




21일 17시

우리 가방 가져간 놈이 17시까지 못 온단다.


What the(3)..

우린 시간이 남아도는 줄 아나...

지가 잘못 가져가놓고 약속은 또 왜 이렇게 안 지키는 거야!!

공항직원이 숙소에 가있으면 그리고 가져다준다고 해서 다시 숙소로 향했다.

그럴 수 있는 거였으면 아침에 왔을 때 그렇게 말해주지... 어쨌든 다시 숙소로 온 우리는 1시간 쯤 지난 후에 드디어 한국에서 챙겨 온 미지근해진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22일 14시

베이징에서 새벽 비행기를 타고 예레반에 도착했다

이번엔 아무리 기다려도 수화물이 나오지 않았다.


What the(4)..

아니 수화물 이슈가 이렇게 매번 일어날 만큼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던가?

하물며 이번엔 대한항공도 아니다.

수화물 찾는 부스에 가서 사정 설명을 했는데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대충 내가 이해한 내용은

"나중에 찾으면 연락 줄 테니 여기 서류를 적어라."

"(전화번호 칸을 가리키며) 난 로밍을 안 해서 전화번호가 없다.(도시락 가져갔다.)"

"받으려면 전화번호 적어야 한다. 유심사와라."


내가 잘 못 알아들으니 수화물 센터 아저씨도 어찌나 짜증짜증을 내던지 잔뜩 기가 죽어 유심을 사기 위해 환전소를 찾아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아니 이게 내 잘못이냐고!!

왜 나한테 ㅈㄹ이야!

너네가 짐을 제대로 주던가!!


공항에 널린 게 환전손데 왜 못 찾았는지는 지금도 이해가 안 간다. 결국 애만 태우다가 통신사 부스에서 달러로 되는지 물어봐서 거의 2배 금액을 주고 유심을 개통했다.




23일 10시

난 저녁에는 공항에서 연락이 올 줄 알았다.

어제 입은 옷 그대로 입고 잠들었다가 제대로 씻지도 않은 상태로(난 샤워하면 꼭 속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새 속옷 없으면 차라리 안 씻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더 더럽게 느껴질 수 있다. 이해한다.) 어제 받아온 종이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했다.


영어로 전화를 해야 하다니 너무너무 긴장되고 하기 싫어서 어젯저녁부터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번호를 눌렀다.


"kdl;ajgpeogad;fpokea..........."

"sorry?"

"dklagkeopwwwuqjmgklpdso........."

"pardon?"


긴 대화였지만 일단 내가 이해한 건 오늘 afternoon에 갈 거라는 얘기였다.

암튼 오늘 오긴 온다는 건데 정확한 시간을 물어보면 뭐라고 말만 많지 결국 모른다는 얘기 같았다.

의사소통이 된다면 짐을 받을 때 어떤 방법으로 받는 건지(숙소 주소 적어놨으니 거기 두고 가는지, 꼭 숙소에 내가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숙소 아닌 다른 곳에서도 받을 수 있는 건지 등)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지만 난 물어볼 수 없었다. ㅠㅠ 아니면 말해줬는데 내가 못 알아들은 건지도 모르겠다.


여행이고 뭐고 집에 가고 싶다.






23일 16시

오전에 좀 멀리 관광을 나갔다가 점심 먹고 나서는 숙소 근처를 맴돌고 있다.

혹시나 갑자기 전화해서 숙소로 오라고 할까 봐.

보통 afternoon은 오후 3~4시 아닌가? 혹시나 내가 전화를 못 받을까 봐 계속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 전화해서 물어보고 싶지만 그녀의 한숨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이건 그 날 산 옷(상, 하의 전부)

23일 21시

저녁도 먹었는데 아직도 연락이 없다.

지금 입고 있는 티셔츠는 3일째 입고 있는 중이다.

오늘도 안 오겠구나 싶어 결국 옷, 속옥, 세면도구를 샀다.









23일 22시 30분

쇼핑을 하고 집에 돌아가는데 전화가 왔다.

아.. 옷 괜히 샀네.

나는 숙소 다 와 간다고 숙소 정문 앞에 있겠다고 말했는데도 계속 좀 걸어서 오란다.

어디로 오라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공항에서 숙소 주소까지 다 적어놓고 왔는데 그 주소로 오면 되잖어!!

횡단보도를 건넜다가 다시 돌았다가 수화기를 붙들고 또 한참을 뛰어다녀서 드디어 만났다.

너무 화가 났지만 어쩌랴, 영어 못하는 죄로 또 죄송하다고 하면서 짐을 받았는데 여권을 달란다.

여권은 숙소에 두고 왔다고 그런 얘기 못 들었다고 했더니 공항에서 준 종이를 보여주며 여기 적혀있단다.

아.. 그래 또 내 잘못이구나.

숙소를 향해 다시 뛰었다.





이렇게 베이징, 아르메니아, 조지아 여행은 나의 가장 힘들었던 여행 1위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다.

영어로 유창하게 말하기 전까지는 여행 안 간다고 독기를 품었지만. 그때뿐이었다.

8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영어로 유창하게 말하기가 새해목표이니까.

이 글을 쓰다 보니 그 때 생각이 나면서 슬슬 또 의지가 불타오른다.

올해는 내가 마스터하고 만다. 이 눔의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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