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선 민달팽이 이야기_21
지방이전 TF로 인해 이대리는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TF일만 하면 좋을텐데, 기존에 이대리가 하던 이사회 지원 업무도 문제가 생기면 수시로 문의가 왔고,
정보 공개 관련 공시 업무는 이대리 이후에 담당하던 담당자가 그 사이 휴직을 가고, 병가를 신청하면서 벌써 업무 관련 인수인계와 문의 대응만 세 번째 담당자에게 하고 있었다.
회사를 오래 다녔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회사에서 오래 일하면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처럼 사람들이 계속해서 업무 히스토리를 물어보고 답해야 하는 사람이 되는건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기도 했다.
이대리에게 그런 백과사전은 김팀장이었다. 김팀장은 회사 곳곳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하루는 '팀장님은 경조사비가 대체 얼마나 들어요?' 라고 물었는데, 김팀장이 웃으며 '적금이라고 생각하고 사는거지 뭐' 라고 이야기를 하는걸 보며 저 사람의 마음 씀씀이는 어디에서 나오는걸까, 싶었다.
옆 팀에서 출산휴가를 갔다가 돌아온 직원도 김 팀장이 챙겨준 유아용 발싸개가 유용했다고 했고, 갑작스러운 맹장 수술로 병가를 다녀온 직원에게는 면역력을 키우라며 김팀장이 비타민을 선물했다는 이야기를 듣게되기도 했다.
경조사 게시판에 올라온 부고의 자리에 김 팀장이 가지 않는걸 본 적이 없었다.
저 사람의 하루는 몇 시간일까, 싶으면서도 나는 저렇게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늘 하곤 했다.
그런 김 팀장의 유일한 낙은 저녁에 마시는 '소주 한 잔' 이었다. 김 팀장과 이 대리의 집은 매우 가까운 편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회사 근처에서, 때로는 집 근처에서 김 팀장은 '번개'라는 이름으로 저녁을 먹자고 했다.
속이 허하면 안된다는 이유였고, 이 대리가 여러 일을 겪으면서 밥을 제대로 못챙겨먹는것 같다는게 이유였다.
김 팀장은 이 대리에게 자신의 동생을 투영하는 것 같았다. 김 팀장이 어렸을 때, 나이차이가 꽤 나는 막내동생이 있었는데 가족들과 휴가를 가서 물놀이를 하다가 잠깐 한 눈을 판 사이에 익사를 했다고 했다.
그 막내 동생과 이 대리가 비슷하다며, 김 팀장은 때로는 이 대리를 딸처럼, 동생처럼, 조카처럼 대했다. 이 대리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그 '돌봄'은 더 강해지는것 같았다.
봄철에는 도다리 쑥국을, 가을에는 전어를 먹어야한다고 했고, 겨울에 감기라도 걸렸다 하면 연포탕을 먹어야 한다며 이대리에게 '잘 먹어야 건강해진다'는 지론을 펼쳤다.
잘 먹으라던 김 팀장이, 어느날부턴가 속이 좋지 않다고 했다. 소화도 잘 안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한여름인데, 김 팀장은 여전히 긴 소매의 셔츠를 입고 있었다. 유독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인데...
왜 긴 소매를 입냐고 물으니, 불쑥 김 팀장이 소매 단추를 걷어서 팔을 보여주었다. 검은 반점들이 팔에 돋아나 있었다.
"요즘 자꾸 이런게 생겨서... 약국가서 연고를 사서 발라도 안 없어지네"
"팀장님, 병원에 가세요. 이럴 때 가는 데가 병원이에요. 왜 병원에 안가세요?"
"이 대리가 나이들어봐. 병원에 쉽게 가지나. 무섭다니까."
"아니, 어린애도 아니고 왜그러세요. 저랑 같이 병원 가요. 안되겠네 진짜."
이 대리의 눈에 그 반점은 심상치 않았다. 아빠의 호스피스 병원에서 만났던 환자의 팔에도, 비슷한 반점이 있었던 기억이 났다.
이 대리는 무서워졌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회사 앞 내과에 무작정 김 팀장을 반쯤 달래고, 반쯤 닥달해서 들이밀었다.
의사는 김 팀장의 피부 상태를 보고, 눈꺼풀과 손톱, 발톱을 체크하더니 물었다.
"언제부터 이러셨나요?"
"좀 됐어요. 여름이 다 가도록 긴 소매만 입고 있어요."
"일단, 피검사를 먼저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학병원 진료 의뢰서도 미리 써드릴게요."
"네? 심각한건가요?"
"자세한건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저희같은 동네 병원에서 진단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일반 피부과 질병은 아닌것 같습니다. 건강검진 매년 안하셨나요?"
"건강검진을 작년에 했을때는 크게 이상있는 내용이 없었어요."
"일단, 소견서 써드릴테니 큰 병원에 가보시는게 좋겠어요."
병원을 나설때 까지, 김 팀장은 아무말도 꺼내지 못했다. 이 대리도 무어라 말을 덧붙일수가 없었다.
혹시나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최악의 기억이 현실이 될까봐, 섣불리 아무말을 할 수 없었다.
"... 이대리"
"네, 팀장님."
"거봐, 내가 무섭댔지. 나 좀 무서워."
"팀장님, 별일 아닐거에요. 큰 병원가서 진료받고, 약 먹으면 나을거에요."
"나 애가 셋이야. 알지? 우리 큰 애는 이제 대학갔고, 쌍둥이들은 고2야."
"알죠, 팀장님. 잘 알아요. 그러니까 병원 가서 치료받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일하셔야죠."
"이 나이 먹고 참... 혼자 또 대학병원 가라는 소리를 들으니까, 생각이 많아지네"
"걱정마세요. 제가 같이 가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