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바치는 글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
세상에 태어난 모든 것들은 당연하지만 애석하게도 정해진 여정을 마치고 떠난다. 정해진 여정이라는 건 사람마다 다른데 어떤 사람은 어느 날 불쑥 찾아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마지막을 준비하시오.”라는 말을 듣고 마지막을 마무리해나가기도 한다.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고, 내가 대신 닿으려 해도 닿을 수 없다. 나의 첫 이별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는데, 대전 할머니가 돌아가신 일이었다. 가는 중에 약간의 눈물이 나왔다. 펑펑 울어대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부끄러웠기에 안 운 척 슬픔을 삼켰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몇 해를 병원에 계셨는데 가뜩이나 마른 몸의 살집이라곤 거죽뿐이었다. 입술은 버적버적 말라서 그 위에는 핏덩이가 앉고 시퍼런 모양새였다. 내가 알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무서움을 핑계로 손 한번 잡아주지 못했다. 이 일이 두고두고 맺혀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본 적도 있다.
‘염’을 할 때였다. 노랗고 시퍼런 할머니의 얼굴은 충격적이었다. 모든 구멍이란 구멍에는 솜으로 막아놓은 모습. 그런 할머니의 마지막을 붙잡고 막내 삼촌은 다섯 살 엄마를 잃은 꼬마 아이처럼 목 놓아 울어댔다. 다 큰 남자가 우는 모습은 또 처음이라 그 장면이 내 뇌리에 깊이 박혀 잊히지 않는다. 이제 화장의 시간. 내가 알고 지내던 할머니가 불구덩이에서 한 줌이 되어야 하다니. 이름 모를 겂이 덜컥 나면서 마음이 아파왔다. 이것이 나와 할머니의 마지막이었다.
할머니와 함께한 것들 중에 기억될만한 것들은 딱히 없다. 내 기억에 할머니는 옛날의 보통 어르신들이 그러하듯 오늘을 좇고 사시는 분이었던 것 같다. 장이 서는 날이면 고춧가루를 한가득 이고 지고 장에다 파셨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 집에 가면 매운 고춧가루의 냄새가 나곤 했다. 그게 고춧가루 냄새였는지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나는 그 냄새를 좋아했다. 어쩌면 할머니의 그 열심을 응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매운 내가 진동하는 집에서 사촌동생들과 “곰지 온다~”하면서 깔깔 대던 그때를 좋아하는 건지. 할머니와 함께 했던 시절을 더듬어 보니 기억나는 게 그뿐이라 고춧가루 냄새까지 좋아하게 되었는지. 어쨌든 사진 속 건강했던 모습 처럼 그곳에서 오래 오래 즐거우셨으면 .. ! 할머니에 대한 내 마지막 바람이다.
다음은 함평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내가 첫아이를 임신하고 있을 때, 정확한 병명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시다가 마지막을 맞이하셨다.
첫 증손주를 보고 가셨으면 좋으련만. 역시 성미 급한 할아버지는 걸음을 재촉하여 떠나신 모양이다.
할아버지는 우리가 간다고 하면 출발시간부터 집을 나와 마을 초입에 서서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었다.
그게 깜깜한 밤이던 눈이 내리는 겨울날이던 관계없이 말이다. 나는 늘 시골에 가면 밥때가 다 되어서 겨우 일어나고는 했는데, 삐쩍 마른 나를 보고 늘 말씀하시던 레퍼토리가 있다. “이것이~ 그래도 깐당 깐당 큰다~”, “된장이고 고추장이고 푹푹 퍼먹어야 써~” 할아버지의 눅진하고도 투박한 애정 표현은 이런 식이었다. 마치 쿰쿰한 누룽지 사탕처럼 구수했다.
할아버지가 떠난 날은 은행잎이 마구 휘날리는 계절이었다. 나는 또 어김없이 슬펐다. 이제 시골에 가면 할아버지를 뵐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눈물짓게 했고, 그렇게 아득바득 살아도 끝은 이렇게도 허망하다는 사실이 나를 허탈하게 했다.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우리의 시간은 지금도 열심히 흐르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줄어들고 있다. 죽음은 여전히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언젠가 한 번은 겪어내야 마땅한 것임을 알지만 매번 왜 이렇게 하염없이 슬픔만이 가득한지 모르겠다.
1남 4녀였던 할아버지는 1950년 6.25 전쟁 당시 북한 군인으로 내려오셨다가 돌아가지 못하셨다고 했다. 그 시절 아들하나 얼마나 귀했을까. 할아버지의 어머니이자 나의 증조할머니는 어떤 마음으로 한생을 사셨을까. 한 감성 했던 우리 엄마도 이런 저런 마음을 헤아리며 퍽 가슴이 아팠으리라. 엄마는 당시 kbs에서 방영했던 ‘이산가족 찾기‘프로그램에 이런저런 서류를 부지런히 날랐다.
긴 시간이었지만 응답은 오지 않았다. 하늘에 신이란게 있긴 한걸까. 아니면 이런저런 기도를 들어주시느라 뒤로 미뤄진걸까. 한 명 한 명 간절하지 않은 마음이 없었을 테니 잃어버린 누이와 동생을 찾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테다.
“내 살아서 이북 한 번 가면 소원이 없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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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길을 떠나시던 날, 찢기지도 흩어지지도 않는 질긴 그리움이 조금은 해소 되셨을까.
‘지독하게 소망했던 당신의 소원을 지금은 이루셨겠지요. 이곳에서 넘쳐흐르던 모든 그리움을 먼지 털어내듯 털어내시고 그곳에서 만큼은 그 누구와도 이별 따위는 영영 없기를 바라겠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모두 다 채 알아가기도 전에 또 앓아가는 사람이 되어버릴까, 오늘은 나의 사람들에게 투박할지언정 안부를 물어야겠다.
구수한 애정을 가득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