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 가족도 함께 살았어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벤자민 플랭클린
"미국에서 유학할 때 교회에서 재정 지원을 받았죠?"
동료 교수들은 내가 다니는 교회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아 미국에서 공부한 것으로 알고 물었다. 사실과 다르다. 초등학교 교사를 그만두면서 받은 퇴직금을 가져갔고, 미국대학 내에서 여러 종류의 일을 하였다.
재정 부분은 유학기간 내내 염려거리였다. 현재(2024년)와 마찬가지로 1990년에도 교육공무원법에 ‘교사가 학위를 목적으로 유학을 가는 경우, 본봉의 50%를 받을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래서 소속관청인 부산시교육청에 유학휴직 가능 여부를 문의했는데 단박에 거절당하였다. 경기도를 비롯한 여러 시도에서는 지원해 주는 사례가 있다고, 수혜자의 이름까지 조사를 해서 알려주었건만, 교육청 관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더욱이 부산시교육청에서는 교원대 특별전형을 마친 교사가 교직을 그만 둘 경우, 파견교사 기간 동안의 지원금을 회수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교원대에 문의하였다. 교육청에서는 소속 교사를 도와줄 수 있는 길을 막았을뿐만아니라, 그를 징계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마침 이병진 교수님이 그 사안을 의논하는 위원회에 참석하였다. 그분은 위원들에게, 교육학을 전공하러 유학을 가는 경우이니 교육분야에 종사한다고 간주할 수 있다고 해석했다. 교원대에서 그러한 의견을 부산시교육청에 보냈으므로, 지원금은 회수당하지 않았다.
결국 초등교사직을 그만두었고 미국에 가면서, 퇴직금 900여만 원을 지참하였다. 그 금액이면 1년 정도는 견딜 것으로 생각하면서. 그런데 미국에서 생활한 지 6개월이 지나자 은행잔고의 바닥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아내의 지혜로 매달 100불씩이 생겼지만, 자녀들과 함께 사는 우리는 돈이 더 필요했다. 학과장인 메릴(Merrill) 교수님에게 상황을 설명하면서 ‘일(campus job)’을 달라고 부탁드렸다. 그분은 대뜸, “너는 영어 구사능력이 약하여 일을 주기 어렵다.”라고 답했다.
재정 압박이 느껴져서 몇 주 뒤 학과장에게 두 번째 부탁을 했다. 간절함이 보였던지, 당시에 학과에서 연구프로젝트를 많이 수행했던 그린(Dr. Green) 교수님에게 가보라고 했다. 그분의 지시로 ‘수학 문제’를 많이 출제해 드렸다. 몇 달 뒤에 그분의 연구가 완료되어 급료가 끊겼다.
다시 학과장에게 가서, 그동안 보아두었던 수업자료제작실(Materials Lab)에서 근로학생 일을 할 수 있게 해 달다고 부탁했다. 그곳은 사범대 학생들이 부직포와 찍찍이(Velcro) 등을 이용하여 수업에 필요한 자료를 만드는 장소였다. 그분은 여전히 나의 의사소통 능력을 문제 삼았다. 그러나 물러서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학과장에게, 자료제작실에서 학생들의 질문을 받으면 먼저 설명을 하고, 이해하지 못할 경우에는 직접 시범을 보이면 된다고 응답을 했다. 학과장의 배려로 거기서 한 학기 동안 일을 했다.
BYU는 대학교내에서 일하는 대학원생에게는 학부 학생보다 시급을 두 배 정도 주었다. 한 학기를 지나고 당시에 수업자료제작실의 관리자(Supervisor)였던 석사과정의 동료가 그만두면서 내가 그 자리를 맡게 되었다. 관리자의 급료는 근로학생일 때와 같았으나 시간 여유가 생겼다. 하루에 두 차례 정도 제작실에 들러 정상적으로 운영되는지에 대하여 점검하고, 부족한 물품을 구입하는 등 필요한 사항을 해결하면 되었다. 1년 반 정도 그 일을 한 다음에는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하여 다른 일을 찾아보았다.
다행히 파슨 박사(Dr. Fawson)의 연구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 프로젝트는 당시에 미국 국무성에서 미래의 미국인들이 배워야 할 세계의 7개 언어에 대한 비디오디스크를 제작하고 있었다. 7개 언어 중에 한국어도 포함되었다. 그래서 연구팀에서는 한국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비디오 자료를 구하기 위하여 한국을 방문하여 서울 시내와 민속촌을 촬영하였다. 파슨 박사는 나에게 그 영상을 검토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아마추어가 찍어서 그런지 영상의 내용이 우리나라의 문화와 생활모습을 포함하기에는 제한적이었다. 게다가 평범한 품질의 비디오테이프를 사용해서 화질도 높지 않았다.
그분의 프로젝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최고 화질과 종합적인 내용으로 구성된 한국 문화 홍보영상을 구해드리고 싶었다. 이 영상은 한국 정부의 소속기관에서 제작하였으므로 내용의 수준을 보증할 수 있었다. 유타주를 담당하던 샌프란시스코 영사관의 한국교육원 원장과 통화를 하여 한국 프로젝트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그분의 제안으로 직접 만나서 추가 협의를 하기로 했으며, 파슨 교수님의 동의를 받아서 한국교육원으로 출장을 갔다.
한국교육원장은 그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이면서 한국을 소개하는 다양한 영상을 구해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 자료는 내용이 방대했을 뿐만아니라 최고의 저장장치에 기록되어 있고, 특히 무료였다. 미국인들의 관점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지원었으므로 파슨 박사가 매우 만족스러워 하였다. 당연히 프로젝트에 필요한 한국 자료는 모두 해결되었다. 그리고 나는 계약 기간 1년 동안을, 영상의 내용에 대한 자문만 하면서 다른 업무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배려를 받았다. 이로 인하여 공부할 시간을 더 확보할 수 있었다. 완성된 비디오디스크에는 한국교육원 원장님과 한국정부에 감사드리는 내용의 자막이 포함되었다.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박사학위를 위하여 소요되는 기간을 단축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학 초기에 학위취득에 필요한 강의를 이수할 계획을 작성하였다. BYU는 학기마다 개설되는 강의가 비슷하였다. 1년 네 학기 중에서 세 학기를 수강하면 3년 반에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졸업계획을 세워서 학과에 먼저 입학한 친구에게 보여주고 조언을 구하였다.
그 친구는 계획표를 보더니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박사학위 기간 전체의 수강계획을 작성한 사람을 처음 보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내가 앞으로 수강할 과목에서 배우게 될 주요 내용과 해당과목을 가르치는 교수의 특징도 자세하게 알려주고고 강의 노트도 빌려주었다. 친구의 조언은 다음 학기 수업부터 도움 되었다. 원래 계획보다 한 학기 뒤인 4년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BYU 박사과정에 다니면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첫학기는 한국에서 가져간 퇴직금으로 생활했다. 다음 학기부터는 학교내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듬해부터는 장학금으로 학비를 면제받았으며 교내 일은 계속했다. 그리고 재학기간을 단축하였다. 재정이 충분히 확보한 상태에서 유학생활을 하면 걱정을 덜 할 것이다. 내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1년 정도 지낼만한 비용이 마련되어 있으면 현지에서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 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 Benjamin Frankl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