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율 Apr 30. 2024

뒤주 속의 프로메테우스

[일전의 편지] 이야기 셋

아침부터 지금까지 불안할 때 먹는 빨간 약을 먹을까 말까 고민 중이다. 너무도 아슬아슬하지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기싸움.

     나는 정말이지 싸움은 하고 싶지 않았어. 지금까지는.


특히나 정신과 약을 어떻게든 먹지 않으려고 애써온 사람에게 정신과 처방을 받는다는 건 마지막 외줄에 오른 것이다. 불타는 땅을 피해서 올랐지만 한 번 떨어지면 다시는 돌아갈 곳이 없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그저 안쓰러울 뿐인 시시한 외줄타기. 옆에서 손을 잡아주는 사람은 없다.

     내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외줄은 비명을 지르고 그 비명소리를 듣고도 무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미치도록 시시한 혼자만의 외줄타기.

     미치지 않았다는 걸 나는 이렇게 증명해야만 하는 거야.


휴가. 복직. 자발성. 실업급여. 월급. 병가. 병력. 지원금. 자해. 자살. 방조. 생존. 치료.

     어지러운 낱말들. 낯 뜨거운 미래의 밑그림.

     지금 여기로부터 멀리 도망치고 싶어.


전화가 울리고 나는 받고 싶지 않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아무도 네라고 하지 않아. 그래서.


이 년 전 여름으로부터.


아직도 배가 고프다. 하지만 크게 느껴지지는 않아. 감정을 줄여버리는 약을 먹어서 그런가. 우울증 약인지 공황증 약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날마다 먹는 정체불명의 세 가지 약 중에 높은 확률로 뭔가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약이 있다. 슬픔을 줄여주는 약. 아니 슬픔을 느끼는 고통이라는 능력을 삭감하는 약이다. 나는 내 고통의 얼굴이 절단되어 불구가 되는 상상을 한다.

     그것에도 얼굴이 있었다면 몹시 고통스러울 것이다.


감정의 억제는 나에게 얼마나 필요한 걸까. 약이 내 느낌을 절반으로 줄여준다면 내 슬픔의 절반도 가져가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기쁨마저 뺏기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아무래도 괜찮은 걸까.

     원래의 나에게 사랑하는 마음이 열이고 고통받는 마음이 백이었다면 사랑하는 마음의 다섯을 잃는 대가로 고통받는 마음을 오십 덜어낸다는 건 나에게 이득인 일일까. 아니면 내 주변에서 나를 바라봐야만 하는 사람들에게만 이득인 걸까. 정신과 의사에게만 이득인 걸까.

     알 수도 없고 지금은 알고 싶지도 않다.

     어쨌거나 나는 곧 먹을 걸 사러 집 밖에 나가야 하고 오늘 먹을 약을 먹고 나갈지 다녀와서 먹을지가 헷갈릴 뿐이다.

     나는 헷갈리는 것이 지금보다 더 많았던 원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고통받는 마음까지 같이 데려가고 싶지는 않다.


나는 차라리 자해를 더 심하게 해서 팔 하나를 절단하게 된다면 덜 고통스러울까를 잠시 생각해보고 싶다.


이 년 전 여름으로부터.


프로메테우스.

     나는 불을 나눠준 적도 없는데 독수리가 내 심장을 파먹고 있다.


아파.

     빈 공간이 늘어나는 심장에 채워지는 건 대체 뭘까. 어둠일까. 아니면 인식의 사체.


프로메테우스. 나는 불을 피운 적도 없는데 불에 타고 있어. 그런데 어떻게 죽지 않고서 인식을 버리지 않을 수 있지.

     프로메테우스.

     더는 불을 나눠주지 않아도 좋으니까 이만 이 불을 꺼줄래.

     이 독수리를 다시 데려가줘. 나는 이제 남은 심장이 없어. 나는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니까.


눈물이 잦아들었다.

     심장이 고통스러워졌다. 울음에 지친 머리통 대신인가.


약이 드디어 내 몸에 듣는 건지도 몰라. 눈물이 사라진 건 그런 거겠지. 아니면 설명할 수 없으니까.

     분명히 내가 원하던 것이긴 하다. 소리도 없이 눈에서 후둑후둑 떨어지는 슬픔이 제발 어떻게든 멈췄으면 하고 바랐으니까. 대가로 무엇을 내주어서라도.

     하지만 심장의 독수리는 좀 과한 것 같다. 이기심의 실체인가. 이젠 차라리 울고 싶다고 느끼는 건.


어제부터 잡생각이 많아졌어.

     자꾸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게 떠오르고 몇 년이나 잊고 있던 기억들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해.

     기억은 서랍이라는 말이 정말로 맞다. 잔뜩 욱여넣고 그대로 뒤돌아버린 내 작은 서랍이 이제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는지도.

     꿈틀꿈틀. 내 그림자 끝에서 탈출하고 있어. 내가 잊고 싶지만 실제로는 전혀 벌어지지 않은 일이었던 수많은 망상처럼 독수리의 둥지 밑에서 태어난 걸까.


     꿈틀꿈틀. 알았어. 이제 그만. 다시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 년 전 여름으로부터.


추신.


세자 훤은 뒤주에 갇혀 단 여드레를 살았다. 훤의 마지막 말은 머리가 울리니 흔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날마다 밀봉된 뒤주를 흔들던 임금 금의 수하들에게 한 말이었다. 그 말은 그대로 유언이 되었다.

     갈사. 목마름으로 목숨을 잃은 그의 나이는 스물일곱이었다. 그가 몰래 뒤주 안으로 가지고 들어간 부채에는 그것을 이용해 오줌을 받아 마신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있었다.

     사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느라 중년에 이르지 못한 나이에 요절했다는 의미의 시호가 그의 사후에 하사되었다. 시호를 내린 임금 금은 죽음을 맞은 그의 이름에까지 그의 죄를 새겨 넣었다. 금은 후회하지 않았다.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완벽한 승리였다.

      적어도 그 승리에만 비춰봤을 때 훤이 지었다는 죄가 실제로 얼마나 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훤이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경우조차도 차선만큼이나 순수악에 가까웠다는 것이었다. 죽기 직전의 훤이 마치 파국을 맞지 못해 안달하는 인간처럼 행동한 것은 단지 불확실성의 공포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이었다. 금은 날씨가 궂을 때면 그것이 반드시 훤의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훤은 날이면 날마다 그날의 날씨를 살피며 벌벌 떨어야 했다. 그 냉혹한 무질서 앞에서 언제 살갗을 관통할지 모를 작두 위를 맨발로 걸으며 훤이 뜻대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훤의 마지막 돌파구는 날씨가 어떻든 상관없이 명백하게 자신의 잘못이 되도록 잘못되지 않은 다른 모든 가능성을 소거하는 것이었다. 훤은 마침내 선택했다. 그리고 평생 그 위를 걸어왔던 작두를 뽑아들어 자신의 온몸을 난도질했다. 멀쩡하게 남아있는 것을 단 하나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 훤의 진정한 의도였다. 그것이 훤에게 주어진 유일한 자유였고 그는 그 자유의지를 관철했다. 그것은 완벽한 패배였다. 어쩌면 처음부터 결말은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훤의 발악은 그것을 아주 조금 앞당긴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를 위한 염원이었는지는 훤이 죽임을 당한 그 순간부터 영원히 미궁 너머로 추락해 버렸다.

     훤이 프로메테우스와 다른 점은 단지 그가 뒤주 속에서 쪼아먹힌 심장은 바위산에 묶인 간과는 달리 다음날이 되어도 재생되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훤도 프로메테우스도 창조주의 현신에 의해 수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훤의 육체는 그 죽음들 속에서 끝내 소멸하기를 선택했고 프로메테우스의 육체는 불사의 운명을 거스르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에게 제우스가 그랬듯이 훤에게 금도 아버지인 동시에 어머니였으며 주군인 동시에 은사였으며 생명의 부여자인 동시에 운명의 절대자였다. 그리고 그들이 덧씌워준 굴레로부터 도망치지 못했고 최후의 최후까지도 용서를 구하지 못했다.

     훤은 뒤주에 갇히기 훨씬 전부터 자신의 심장 깊숙한 곳에 병이 들었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주 눈물을 흘렸고 어떻게든 이 병을 떨치고 싶다는 간절함을 주변 사람들에게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심연의 고통을 기꺼이 달가워하는 독수리의 예리한 시야는 한 번 낚아챈 먹잇감을 죽는 그 순간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금은 훤이 죽음에 이르던 여드레의 시간 동안 일부러 뒤주와 가장 가까운 궁에 기거하며 그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소식을 손꼽아 기다렸다. 이미 꺼져가는 숨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그 낮은 고도의 날개짓을 훤은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훤이 프로메테우스를 만났더라면 그는 필히 심장이 아닌 간을 노린 제우스의 자비에 감탄했을 것이다. 마음으로부터 퍼져나간 병으로 육체까지 마비되고 만 사람은 모든 장기가 동일한 크기의 고통을 담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심장은 진실로 마음의 현신이다. 따라서 프로메테우스의 삼만 년이 훤의 여드레보다 더 지난했을 것이라고 감히 속단할 수 없다.

     하물며 훤은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오직 독수리에게만 그것을 증명해 보일 수 없었던. 너무도 외로운.


열두어 살 무렵의 나는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아이였다. 성적은 늘 최상위권이었고 옷매무새는 늘 단정했고 자세는 늘 바랐고 매 학기마다 반장이나 회장을 맡았으며 친구들 역시 늘 적당히 사귀었다. 철저하게 타자의 의해 조작된 그 설계도 안에서 내 유일한 돌파구는 매일 점심시간마다 배식으로 분주해진 교실을 조용히 빠져나와 몰래 도서실로 향하는 것이었다. 나는 사서 선생님의 눈을 피해 가장 구석진 서가에 몸을 웅크린 채로 한 권의 책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천천히 읽는 날은 절반도 다 읽지 못했고 빨리 읽는 날은 두세 번을 연달아 읽었지만 그 책이 아닌 다른 책을 펼친 적은 맹세코 단 하루도 없었다. 그렇게 똑같은 책을 열 번 스무 번 백 번 읽는 일을 거듭할 동안 책이 나에게 주는 따스한 안온함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점심시간이 다 끝나고서야 뒤늦게 찾아오는 공복의 고통은 책을 읽을 때 느껴지는 진실된 감정과 맞바꾸기엔 한없이 초라할 뿐이었다.

     그 책의 주인공은 뒤주에 갇혀 죽은 세자 훤이었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그것은 온전히 훤의 이야기였고 어쩌면 그가 끝까지 감춰뒀던 완전한 진심이었다.

     훤이 금에게 바란 것은 무조건적인 애착이 아니었다. 심지어 자비도 포용력도 그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금은 훤에게 단 한순간만 허락했어도 충분했을 그것은 그 무엇도 아닌 인간으로서의 이타심이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내비쳐 마땅한 이타심. 햇빛이 그림자에 닿아 사라지는 그 짧은 찰나에만이라도 이기심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이타심. 너 역시 사람이기에 외로운 것이라고 말해줄 수 있는 그런 이타심만이 훤에게는 필요했고 그렇기에 갈망했다.

     그러나 끝내 훤에게는 그것이 충족되는 일만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평생에 걸친 투쟁은 철저하게 모두로부터 배타적인 형태로 마무리되었다. 반전의 실마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불행만이 가득한 이 이야기가 어째서 갓 십 대에 접어든 한 어린 인간을 그토록 매료시켰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알지 못하겠다. 다만 그때 이미 마음 깊이 이해했다고 믿었던 그의 슬픔이 십수 년의 시간이 흘러 내가 결국은 간직하게 된 것들과 교묘히 합치된다는 사실로부터 그의 예언자적 기질을 감지할 수는 있을 것도 같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상상조차 하기 싫은 그 최초의 순간으로부터 잉태된 고유의 법칙일지도 모른다. 까마득히 먼 옛날부터 유구히 전해져 내려오는. 마치 어둠을 밝히는 불씨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죽임이 아닌 죽음을 맞이할 권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