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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엔지니어, 함바식당에서 삶의 뷔페를 맛보다

함바식당 일은 어떨까?

by 기록습관쟁이

고등학교, 대학교, 군대, 그리고 직장까지. 내 삶은 오직 엔지니어라는 한 길을 향해 있었다. 미니카부터 RC카, 바이크, 자동차까지. 바퀴 달린 움직이는 모든 것에 흥미를 느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전기공학을 전공했고, 정보통신공사업에 몸담았다. 자그마치 20년을 보냈다. 오랜 시간을 무색하게 만들고 싶었던 걸까. 일탈이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일에 매너리즘에 빠졌던 것일까. 아마 그 해답을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2021년 9월, 나는 삶의 전혀 다른 페이지를 펼치기로 했다.


회사와의 계속된 마찰로 사직서를 준비하던 중, 한 지인이 손을 내밀었다.

"나랑 같이 일해보지 않을래?"

지인은 경기도에서 함바식당(한식뷔페)을 운영하고 있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제안에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저는 음식 만드는 재주는 없는데요? 아시잖아요. 저 현장 기술자인 거."

"알지. 근데 너보고 음식 하라는 게 아니고, 식당 운영을 도와줬으면 한다."

'운영'이라는 말에 솔깃했다. 거기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니, 왠지 모를 흥미가 생겼다. '한번 해볼까? 재밌을 것 같기도 한데.'


물론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혼자인 것도 아니고 처자식이 있는 가장으로서, 이전 직장만큼의 보수는 받아야 했다. 고민하는 나에게 지인은 말했다.

"일단 세후 300만 원 챙겨줄게. 가게가 더 잘되면 더 챙겨주고."

보수가 높은 건 절대 아니었다. 이전 직장보다도 적은 급여였다. 하지만 식당일에 문외한인 내게 초급으로 이 정도를 챙겨준다는 건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무엇보다 지인의 다음 말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지금 식당이 잘 돼서 더 확장할 계획이야. 네가 잘 따라와 주면 좋은 제안이 갈 수도 있고."

이 말은 내가 언젠가 내 식당을 운영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꿈을 꾸게 했다. 너무나 매력적으로 들렸다. 그렇게 나는 20년간의 엔지니어 삶을 뒤로하고, 처자식을 부산에 남겨준 채 홀로 경기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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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냄새부터 달랐다. 익숙했던 전선의 탄 내음, 납땜 냄새 대신 구수한 밥 냄새와 뜨거운 국물 냄새가 코를 찔렀다. 100개가 넘는 테이블, 3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 삼성반도체 건설 현장 인근에 있어 아침, 점심, 저녁을 가리지 않고 작업자들이 들이닥치는 곳이었다.

'잘 될 수밖에 없는 식당이군.' 첫인상은 그저 성공의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2년이라는 시간은 나에게 '사업'이 얼마나 치열한 전쟁터인지를 가르쳐주었다. 첫날 새벽 4시. 알람 소리에 맞춰 눈을 떴을 땐,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먼저였다. 아직 해가 뜨기도 전, 캄캄한 어둠 속에서 가게 문을 열고 불을 켰다. 밥솥에 쌀을 씻어 안치고, 국과 반찬 재료를 꺼내놓으면 어느새 주방 식구들이 하나둘 모였다. 새벽 5시. 작업자들이 아침을 먹으러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전쟁은 시작되었다. 아침식사 시간이 끝나면 곧바로 점심 준비를 했다.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밥, 국, 각종 반찬들이 떨어지지 않게 온 직원들은 뛰어다녔고, 나는 카운터에서 업체 직원들에게 사인을 받거나 식권을 받으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식사를 하지 않는 작업자는 매점에서 생필품이나 과자음료를 챙겨 왔고, 나는 정확한 계산을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렇게 하루에 마주치는 사람이 천 명은 족히 되었다.


삶의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뚫고 내 가슴에 박혔다. 사업이 망해 빚더미에 앉아 이곳에서 악착같이 버티는 아저씨. 함께 운영하던 카페가 망해 아이들을 남겨둔 채 위험천만한 현장으로 뛰어든 부부, 나와 같이 멀리 타지에서 올라와 홀로 고군분투하는 청년들. 나는 그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건네는 것으로 위로를 전했다. 그들은 밥 한 그릇에 담긴 정성으로 고단한 하루를 버텨내는 힘을 얻었다. 20년간 기계와 소통해 온 나는, 이제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물론 그 과정이 아름답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월 식대 결제가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했기에, 현금 회수는 곧 생존 문제였다. 어느 날, 매달 수백만 원의 식대비를 내던 한 업체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나는 그들을 잡기 위해 경기도 전역을 쫓아다녀야 했다. 마치 스릴러 영화 속 주인공처럼 말이다. 식자재비를 최소화하기 위한 몸부림은 또 어떠했나. 식재료 하나하나의 단가를 따지고, 납품 업체와 실랑이를 벌이며 지출을 줄여나갔다. 엔지니어 시절, 수십억 원짜리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도 해보지 않았던 '돈 관리'에 대한 감각이 그곳에서 눈을 떴다.


주방 사람들과의 불화는 또 다른 난관이었다. 한 번은 주방 보조 이모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생겨 한꺼번에 세 명이 그만둬 버렸다. 새벽 5시에 당장 밥을 해야 하는데, 사람은 없고. 나는 부랴부랴 인력사무소에 전화를 걸고, 지인들에게 SOS를 쳤다. 며칠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방을 뛰어다니며 밥을 푸고, 설거지를 하고, 서빙을 했다. 20년간 펜과 공구만 들던 내 손에 국자와 행주가 쥐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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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놀라웠던 경험은 버스 운전이었다. 건설 현장까지 작업자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지인은 나에게 대형 면허증 취득을 권했다.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버스 운전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식당 운영을 돕기 위해 나는 생전 처음 대형 면허 학원에 등록했다. 거대한 버스를 운전하며 좁은 길을 통과하고, 능숙하게 현장으로 들어서는 내 모습을 보며 나 스스로도 놀랐다. 20년간 전기선만 만지던 손으로, 이제 수십 명의 생명을 책임지는 운전대를 잡게 된 것이다.


2년의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하루하루가 정말 어메이징 했다.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은 식당 운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신 나는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 법, 삶의 쓴맛과 단맛을 이해하는 법, 그리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에 도전하는 용기를 배웠다. 나는 이제 다시 본업인 정보통신공사업으로 돌아왔다. 익숙한 전선과 회로를 마주하며 일하고 있다. 하지만 2년 전의 나와 지금은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예전의 나는 그저 계산된 회로도를 따라가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은 그 회로 속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려는 사람이다. 기계가 아닌 사람에게서 삶의 지혜를 얻었던 2년. 그 시간은 내 인생에 가장 귀한 뷔페였다. 고단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건넸던 것처럼, 이제는 내 경험이라는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사람들에게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오늘 저녁에도 밥솥에 쌀을 안친다. 내일 아침, 따뜻한 밥을 기다릴 사람들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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