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
“지금은 기술로 먹고사는 시대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그 말을 하셨다. 어린 시절 경북 봉화에서 자란 아버지는 기술을 배우겠다며 부산으로 내려왔다. 공부보다는 손기술에 능하셨고, 덕분에 지금까지도 그 손으로 먹고살고 있다. 일 잘한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 걸 보면 손재주는 타고나신 듯하다. 그래서 더더욱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남중, 남고, 공대, 군대.
누가 봐도 ‘남자들의 코스’를 정석으로 밟았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는 조금 달랐다. 야성미도 없고, 적극적이지도 않았고, 시끄러운 분위기엔 어울리지 못했다. 그런 내가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환경에서 빛을 발할 리 만무했다.
하고 싶은 일도 없었고, 꿈이나 목표 같은 건 남의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보며 더더욱 기술을 강조하셨다. 그렇게 내 삶은 아버지의 바람에 이끌려 흘러갔다.
억지로 공부했고, 억지로 전공을 택했고, 억지로 남들 하는 것처럼 군대도 다녀왔다. 전기전자공학을 전공했지만, 내 머릿속에 남은 건 거의 없었다. 학점은 엉망이었고, 공부보다 노는 게 훨씬 좋았다.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하기엔, 너무 무심했던 시간들이었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하고 싶은 일은 여전히 없었다.
오히려 막막했다. 기술로 먹고살라는 말이 뭔지 이제야 피부로 와닿았다. 그렇게 허우적거리던 어느 날, 우연히 드라마를 보게 됐다. 김승우가 나오는 [호텔리어]였다.
잘 다려진 슈트를 입고 고객을 대하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그래, 내가 찾던 건 이거야!’
드라마 속 세상이 나를 끌어당겼다. 현실은 달라도, 나도 저런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대 출신에, 군대에서도 통신병이었던 나는 어딜 봐도 ‘공돌이’였다. 하지만 그날 이후, 나는 호텔리어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교육원을 등록하고, 두 달간의 호텔 서비스 교육을 받았다. 매일 미소 짓는 연습부터 복장, 말투, 태도까지 배웠다. 안 쓰던 얼굴 근육으로 웃는 게 고역이었지만, 어쩐지 조금씩 인상이 부드러워지는 걸 느꼈다. 인상도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면접을 보기 시작했는데, 줄줄이 떨어졌다. 제주도의 한 호텔 면접에서는 대놓고 외모를 지적받았다. 평소 콤플렉스였던 피부가 더 싫어졌다.
서비스업은 보이는 게 8할이라는 말, 그때 처음 실감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칠전팔기의 심정으로 계속 도전했고, 결국 부산 해운대의 한 호텔에서 합격 소식을 들었다. 사장 면접까지 갔고, 여사장님의 온화한 미소 덕분이었을까, 나는 드디어 호텔리어가 되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프런트가 아닌 연회장으로 배치되었다. 영어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교육원 동기들은 외국어 능력이 뛰어났고, 나는 그 경쟁에서 밀렸다. 연회장은 결혼식, 돌잔치, 기업행사, 학회, 패션쇼까지, 거의 매일이 행사였다. 뷔페 세팅, 음향, 조명, 아르바이트생 관리까지… 정신없이 돌아가는 현장이었다.
문제는, 그 속에서 내가 너무 미약했다는 것이다.
30명이 넘는 아르바이트생들을 관리해야 했지만, 소극적인 나의 말은 잘 통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선임은 나를 갈궜다.
“똑바로 안 해? 애들 저렇게 놔둘 거야?”
욕설은 기본이었다.
존중이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상상했던 호텔리어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고객은 우아한 서비스를 받지만, 직원들은 직원 전용 통로에서 욕을 내뱉고 담배를 피운다. 담배 냄새조차 흔적 없이 지우는 그들의 능숙함에 놀랐다.
고객 앞에선 백만 불짜리 미소, 뒤에선 욕설과 냉소.
그 이중성은 내가 생각한 서비스업의 이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나는 점점 지쳐갔다.
매일같이 야단맞고, 마음은 마를 틈이 없었다.
고객을 위한 미소는커녕, 나 자신을 돌볼 여유조차 없었다.
결국 나는 사직서를 냈다. 참패였다.
공돌이였던 내가 화려한 직업에 도전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이 일을 통해 한 가지는 분명히 알게 됐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
서비스업은 정말 힘든 일이라는 것.
그리고, 그 일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하다는 것.
돌고 돌아 결국 나는 다시 기술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늘 말하던 그 길.
그제야 알겠더라.
기술로 먹고 산다는 말의 무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