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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방 알바 이야기, 게임보다 더 진짜였던 밤

카운터에서 바라본 풍경

by 기록습관쟁이

어릴 적부터 게임을 좋아했다. 국민학교 시절, (나는 마지막 국민학교 졸업생이다) 토요일마다 무료 개방하는 컴퓨터 학원에 가서 '페르시아의 왕자'가 되겠다고 열을 올렸고, 중학생 땐 PC방에서 500원을 들고 '스팀팩'을 쓰며 외계 종족을 학살했다. 포트리스 세계로 들어가 금메달을 목에 걸기 위해 주야장천 포탄을 쏴댔다. 고등학생이 되자 밤잠을 설쳐가며 '디아블로'를 잡았다. 게임은 내 삶과 늘 붙어 다녔다.


방학이 찾아왔다. 나는 늘 그래왔듯 학점을 위한 최소한의 공부만 했다. 남은 시간은 용돈이라도 벌자며 벼룩시장 구인란을 훑다가 PC방 알바 공고를 발견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PC방에서 일했다.


근무시간은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계산도 하고, 자리가 비면 주변 정리도 하고, 컵라면이나 핫바가 들어오면 진열하며 장부도 적었다. 6시가 되면 야간 알바 형이 출근했고, 난 교대 후 집으로 돌아갔다.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한 시간에 천 원. 초등학교 저학년들이 점심시간이면 500원을 들고 러시를 해왔다. 30분을 알차게 쓰고 갔다. 간식은 사치였다. 가끔 부모님 지갑에서 몇 장 꺼낸 듯한 부유한(?) 아이들이 이것저것 사 먹곤 했다.


어느 부부는 아침마다 함께 오곤 했다. 남편은 출근길에 아내를 내려주고, 아내는 남편 퇴근시간까지 게임 삼매경. 주말엔 부부가 함께 하루 종일 게임을 했다.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들 웃음 속엔 무언가 알 수 없는 만족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항상 점심 무렵에 나타나는 여자 손님도 있었다. 제법 예쁜 외모에 화려한 옷차림. 자리에 앉자마자 재떨이와 조명을 주문했다. 웹캠에 비친 얼굴을 보며 조명을 조절하고, 웃으며 화상 채팅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밖에서도 뭐든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또 한 명의 단골은 푸근한 인상의 남자였다. 매일 아침 출근하듯 와서, 퇴근하듯 집으로 갔다. 몇 주간 지켜본 나는 눈치를 챘다.

'아, 집에서는 아직 실직 사실을 모르는구나'


어느 날 그는 퇴근시간이 지나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내가 다시 출근했는데...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렇게 씻지도 않은 채 쉰내를 풀풀 풍기며 PC방에서 나흘을 버틴 그 남자... 결국 사장님이 중간 정산을 부탁했고, 그는 죄송하다며 조용히 계산 후 사라졌다. 그 이후, 그는 다시 볼 수 없었다.


한 달쯤 되었을까. 야간 알바 형이 그만뒀다. 사장님은 내게 야간을 부탁했다. 낮엔 직접 가게를 보겠다고 했다. 알바비도 조금 더 벌 수 있으니, 나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야간 일은 쉬웠지만, 문제는 '잠'이었다. 처음 며칠은 졸음을 쫓기 위해 세수를 하고, 스스로를 쥐어뜯으며 버텼다. 그러나 일주일쯤 지나자 눈꺼풀이 배신을 때렸다. 새벽 두 시부터는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고, 이때부터 사건사고가 시작됐다.


조용히 도망가는 손님이 생겼다. 누군가는 빵과 음료를 슬쩍했다. 아침마다 정산이 맞지 않았다. 사장님께 호되게 혼났고, 결국 부족한 금액은 내 알바비에서 빠졌다.

"열심히 일하고도 돈을 덜 받는다고?"

억울했지만, 밤에 눈을 똑바로 뜨고 일하는 것도 내겐 지옥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묘책. 나도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카운터 앞 가장 좋은 자리. 손님이 가장 잘 보이는 곳. 거기서 게임을 하며 깨어있으려 애썼다. 손님들과 같이 게임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간신히 마감을 이어갔다.


술을 마시고 온 듯 볼이 빨간 여성 손님들도 있었다. 잊을 만하면 나타났고, 항상 텐션이 높았다. 카트라이더에서 운전 실력을 뽐내는 모습이 참 귀여웠다. 하루는 음료수를 서비스로 줬고, 그게 인연이 되어 아직까지 연락하고 지낸다.


그럼에도 정산은 여전히 맞지 않았다. 몇 백 원, 몇 천 원. 매일 돈이 조금씩 모자랐다. 그 차액은 늘 내 쌈짓돈에서 채워 넣었다.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생각했다.

'아, 이제 그만해야겠다.'


그렇게 내 PC방 알바는 끝이 났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다양한 사연을 들여다봤다. 모두가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듯 PC방으로 들어왔지만, 누구 하나 악한 사람은 없었다.

언젠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겠지.

힘듦과 위기를 이겨내고, 스스로 떳떳해질 날이 오겠지.

아마 그들도, 카운터에 앉은 나를 보며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자.

그 자리에서 더 빛나보자.

인간은 누구나 빛 날 수 있는, 다이아몬드 원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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