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쓰느냐 마느냐, 그게 문제다
'오늘은 좀 써질까?'
노트북을 켜고 빈 문서를 띄우는 순간, 매번 같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마우스를 몇 번 움직이다 커서가 깜빡이는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괜히 방 정리를 시작하고, 커피를 내리고, 또 안 하던 설거지를 하고 나면 어느덧 자정을 넘기고 있다. 결국 오늘도 쓴 건 아무것도 없다는 허탈감만 남는다. 작가가 된다는 건, 매일 이 싸움을 반복하는 삶을 선택한다는 뜻이다.
누구나 글을 쓸 수는 있다. 하지만 '매일'쓴다는 건 다른 차원 이야기다. 무에서 유를 짜내는 고독한 노동. 책상 앞에 앉는 일조차 버거울 때가 많다. 머릿속엔 아이디어가 가득한데, 막상 문장으로 뽑아내려 하면 딱딱 끊겨버린다. 어떤 날은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앉았는데, 손이 마음을 앞질러 달릴 때도 있다. 창작은 늘 이렇듯 예측 불가다. 그래서 쓰는 사람은 경우의 수를 줄여야 한다.
몇 년 전, '아침형 인간'을 표방하며 새벽 5시에 일어나 글을 쓰겠다는 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다. 고작 사흘 만에 무너졌고, 이후엔 '저녁형 인간'이라 주장하며 퇴근 후 글쓰기를 시도했다. 결과는 마찬가지. 하루 종일 에너지를 다 써버린 후의 나는, 문장을 꺼내기엔 너무 지쳐 있었다. 그런 시행착오 끝에 지금은 딱 하나만 남겼다.
"일단, 책상 앞에 앉자."
글이 써지지 않아도, 눈앞에 커서가 멈춰 있어도, 뭔가를 쓴 척이라도 하는 척이라도 하며 앉아 있기. 그 자세 하나로 하루를 버틴다. '오늘은 도저히 안 써진다'는 생각이 들 때일수록, 이상하게도 책상에 30분만 앉아 있으면 최소 한 문장은 나온다. 그 문장 하나가 다음 문장을 낳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두세 문단은 써진다. 물론 전부 지워버리는 날도 있다.(사실 지운 글이 훨씬 많다) 그래도, 지우는 것도 글쓰기의 한 과정임을 이제는 안다.
예전에 좋아하던 한 작가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하루에 단 한 줄만 써도 그날은 글을 쓴 날이다"
그 말이 참 위로가 되었다. 처음부터 1,000자, 2,000자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 부담만 커진다. 단 한 줄이라도, 나만의 생각을 꺼내고 나만 뭔가 해냈다는 감각이 남는다. 그래서 요즘은 매일 아침, 작은 루틴을 만들어 실행 중이다.
- 아침에 눈을 뜨면, 어제 쓴 글 중 가장 맘에 드는 문장을 다시 읽는다
- 출근 전 책상에 앉아 최소 10분간 글과 관련된 무엇이든 끄적인다
- 마음에 드는 글귀는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에 따로 저장해 놓고, 제목 아이디어도 모아둔다
- 카페에서 스쳐 들은 대화, 거리에서 본 풍경, 아들의 말실수까지 다 메모하고 기록한다
이 모든 게 당장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어느 날 문득 한 줄짜리 글감이 큰 서사의 단서가 된다. '이걸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메모가 기획이 되고, 루틴이 결과물이 된다. 운이 좋을 때 쓰는 게 아니라, 계속 쓰고 있었기에 운이 오는 날을 맞이할 수 있는 거다.
사실 '오늘도 써야지'라는 강박이 때론 창작을 망친다. 쓰려는 욕심이 너무 앞서면, 글이 아니라 자책이 남는다. 그런 날은 그냥 이렇게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린다.
'오늘은 완성하지 못하더라도, 내 안에서 무언가는 조금씩 써지고 있겠지'
이건 그냥 스스로를 달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진짜 사실이다. 무언가를 써보겠다는 의지가 계속 안에 있으면, 내면 어딘가에선 문장들이 자라고 있다. 그게 언제 꺼내질지는 모르지만, 사라지지는 않는다. 나는 그걸 '내면의 예열'이라 부른다. 언제든 출발할 수 있도록 엔진을 따뜻하게 유지하는 일. 글이 잘 써지지 않는 날도, 그렇게 예열만 하고 있다면 나는 여전히 작가의 삶을 살고 있는 거다.
'작가가 되는 법'같은 책이나 강연은 많지만, 결국 작가는 <쓰는 사람>이다. 출판 유무도, SNS 좋아요 수도, 조회수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건 이거다.
"난 어제보다 오늘, 한 줄이라도 더 써봤는가.."
"난 오늘도, 내 안의 경우의 수를 하나 줄였는가.."
글이란 건 결국, 쌓이고 쌓여서 하나의 흐름이 된다. 그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흐릿하게라도 매일 적어보는 것. 그렇게 우리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된다. 아니, 매일 쓰느냐 마느냐 고민하는 그 태도만으로도, 이미 어느 정도는 작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 중 하나는 이렇다.
"작가는 천재가 아니라, 매일 자기 자리에 앉는 사람이다"
작가는 예술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근면한 노동자'다. 이 직업은 창의성만으로는 유지되지 않는다. 습관이 필요하고, 체력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자리에 앉을 '결단'이 필요하다. 그런 작가의 삶은 참 단순하고도 고요하다. 하지만 그 단순함을 반복하는 사람만이, 끝내 무언가를 완성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책상에 앉는다.
쓸 수 있을지, 쓸 수 없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경우의 수 하나는 줄였다고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