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 속에 담긴 사랑과 희생
한 달의 절반은 타지에서 생활할 정도로 잦은 출장을 다닌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은 아직 혼자 하는 게 서툴러서 아빠로서 늘 신경이 쓰인다. 나도 모르게 아들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곤 한다. "밥은 잘 먹었어?", "태권도는 잘 다녀왔어?", "혹시 어디 다치지는 않았어?" 같은 시시콜콜한 질문들이다. 때로는 아들이 "아빠, 나 지금 게임하고 있어서 바빠. 끊어!" 하며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을 때도 많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내 마음은 한결 놓인다. 그 짧은 통화가 내게는 하루의 고단함을 잊게 하는 안도감이 된다.
운 좋게 장모님께서 아들을 어릴 적부터 잘 보듬어주셨다. 아내가 직장인에서, 다시 전업주부로, 최근에는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장모님의 도움은 더욱 절실해졌다. 장모님이 안 계실 때면 아들이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학교에서 돌아와 텅 빈 집에 혼자 들어서는 아들의 뒷모습을 상상하면, 내 마음 한구석이 늘 시큰거린다. (그나마 반려견 초코가 있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서일까. 아들의 전화벨 소리도 내 심장 소리처럼 잦아지고 있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며 '우리 부모님은 어떠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내가 동생과 함께 아주 어릴 적부터 일을 시작하셨다.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아 맞벌이를 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의 첫 보금자리는 햇볕조차 잘 들지 않던 낡고 좁은 단칸방이었다. 창문 하나 없는 작은 방에서 네 식구가 부대끼며 살았지만, 어린 우리에게는 그곳이 세상 전부였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 출근하시기 전, 그 작은 방의 낡은 방문을 굳게 잠그고 우리를 두고 나가셨다. 방문이 잠기는 '철컥'하는 소리는 어린 내게 알 수 없는 두려움이자 어머니가 곧 돌아오실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동생과 둘이 남겨진 방 안에서 우리는 그림을 그리거나 장난감놀이를 하며 어머니를 기다렸다. 때로는 배가 고파 울기도 하고, 서로 다투다 결국엔 지쳐 잠들기도 했다.
점심시간이면 어머니는 제법 멀리 떨어진 직장에서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오셨다. 밥 한 숟갈 제대로 뜨지 못하고, 당신의 작은 손 두 개로 우리 형제의 손을 부여잡고 짧은 시간을 오롯이 육아에 쏟아부으셨다. 점심시간은 어머니에게 휴식이 아니라 또 다른 전쟁이었을 거다. 서둘러 밥을 먹이고, 옷을 갈아입히고, 혹시라도 아픈 곳은 없는지 살피셨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머니는 마치 영화 속 슈퍼히어로처럼 모든 것을 해내셨다. 우리가 잠든 사이에도 어머니는 살림을 정리하고, 빨래를 개고, 다음 날 먹을 음식을 준비하셨을 거다. 새벽 일찍 일어나 가족의 아침을 준비하고, 밤늦게까지 집안일을 돌보셨던 어머니의 모습은 어린 내 기억 속에 희미하지만 선명하게 남아있다.
어머니는 일과 육아, 그 무거운 짐을 한 번도 내려놓지 않으셨다. 그 당시에는 그저 엄마니까 당연히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아버지가 되고, 아들을 키우면서 비로소 어머니가 짊어지셨던 삶의 무게가 얼마나 거대하고 숭고했는지 깨닫게 됐다. 요즘은 아이를 키우는 게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어 부부가 함께 육아를 분담하고, 양가 부모님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나 역시 장모님의 도움을 받고,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노심초사한다.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출장길에 아들에게서 온 전화 한 통에 가슴을 쓸어내리거나, 혹시라도 아들이 아프다는 소식이라도 들리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얼마 전, 이런 내 모습을 문득 스쳐보던 아내가 빙긋이 웃었다. 아내는 "아들바보 다 됐네"하며 놀리듯 말했지만, 순간 내 머릿속에는 어머니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전화기 한 대 없던 시절, 어쩌면 어머니는 출근하신 내내 우리가 잘 있는지, 밥은 먹었는지, 혹시 다치지는 않았는지 내 아들 걱정하는 내 마음보다 수백 배는 더 큰 걱정을 하셨을 거다. 당신의 일터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 우리를 떠올리며 초조해하셨을까. 그 시절, 어머니에게 '워킹맘'이라는 멋진 수식어는 없었을 거다. 가족의 위해 묵묵히 자신의 짐을 감당하는 평범한 어머니였을 뿐.
하지만 그 평범함 속에 담긴 사랑과 희생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삶의 모든 순간을 우리를 위해 헌신하셨고, 그 헌신은 나와 동생이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어머니의 낡은 손, 주름진 얼굴, 그리고 굽은 어깨는 그 모든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세상 모든 어머니는, 정말 위대하다. 그분들의 삶은 희생과 사랑으로 가득 찬 가장 아름다운 서사다. 오늘 밤, 잠든 아들의 작은 숨소리륻 들으며, 문득 어머니께 전화 한 통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엄마, 잘 지내시죠?"라는 짧은 안부에도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미소를 지으실 거다. 나의 어머니가 그러셨듯,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자식에게 영원한 등대이자 무한한 사랑의 원천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