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르시시스트에게서 도망친 임상심리사입니다.
그 뒤로 틈틈이 전화가 왔다. 보통은 오후 6시~12시 사이에 한 번에서 두 번 정도 전화가 왔다. 친구와 함께 있는데 또 전화가 왔다. 나는 전화기를 무음으로 바꾸고 테이블에 뒤집어 올려놨다. 이제는 말해주지 않아도 전화 건 사람이 누구인지 친구는 알 수 있었다.
친구가 고개를 절레저레하며 말했다.
- 지치지가 않는구나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 차단하면 또 찾아오겠지?
"응. 일단 신호만 가면 안 받아도 찾아오지는 않으니까."
- 차단했는지 확인하는 건가? 전화만 오는 거야?
"장문에 문자 하나가 왔었어."
- 뭐라고?
"그날 미안하다고 말로 사과하고 싶지만 전화 안 받을 거니까 문자로 사과한다고 그날 일만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해서 마지막이라도 사과는 꼭 하고 싶었다고"
- 미끼지?
이제 친구는 나만큼이나 나르시시스트 전문가가 다됐다.
"그렇지, 전화받게 하려는 미끼지"
- 그래, 제발 찾아오지만 마라.
"응. 전화는 안 받을 자신 있으니까"
- 뭐?! 전화는? 그럼 찾아오면?
친구는 진심으로 버럭 했다. 나는 멋쩍게 웃었다.
내가 확실하게 마음만 먹으면 헤어질 수 있을 줄 알았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오만이다. 나르시시스트라는 것을 알았고, 지켜보면서 확인도 했다. 마음으로 받아들일 충분한 사건도 경험했다. 반드시 도망쳐야 한다는 확고한 생각으로 벗어나기만 하면 끝날 줄 알았다. 웬걸 '감히 내가 먼저 나르시시스트를 떠나겠다고 생각했다니' 아차 싶었다. 당시 상황이 괴로워 도망치는 것만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바로 나르시시트의 '유실 불안'이다. 유실 불안은 내가 만든 용어이다. 심리학에 '유기 불안'이라는 용어가 있다. '유기 불안'은 심리학자 존 볼비의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과 관련 있다. 의미 있는 대상(애착을 형성한 대상)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버려질 것에 대한 두려움을 말한다. 우리는 누구나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나르시시스트에 대한 애착은 뒤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나르시시스트의 '유기 불안'은 건강한 애착을 형성한 사람보다 더 크다. 불안보다 공포에 가깝다. 하지만 그들은 '유기 불안'을 '유실 불안'으로 느낀다. 내면 깊숙한 무의식에는 유기 공포가 자리 잡고 있지만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 자신이 버림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애착 대상을 유실물처럼 잃어버린다는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즉, 그들 입장에서는 잃어버린 애착 대상은 자신의 것이니, 찾을 수 있다면 다시 찾는 것이 당연하다. 상대방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 나르시시스트는 애착 대상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보다 잃어버리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물론 싫다는 표현도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서 하는 거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진심은 의미 없다. 그들에게 다른 대상이 생기거나 자신이 싫증이 날 때까지 애착 대상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된다.
나에게는 이별이지만 나의 나르시시스트에게는 잃어버린 것을 찾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가 의미하는 것은 언제든지 찾으러 갈 수 있다는 안도감이다. 이 안도감은 자신의 통제력이 상실되지 않은 것으로부터 온다. 그래서 차단을 하면 통제력에 대한 불안으로 바로 찾아와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선 번호를 차단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마음먹는다고 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망치는 것도 그냥 도망이 아닌 잠적에 까까워야 한다. 나는 이후 나르시시스트 피해자만 대상으로 하는 익명의 상담을 하면서 다양한 도망 사례를 들을 수 있었다. 이직, 이사는 기본이고 이민을 준비하는 분도 계셨다. 전화번호, 주거래 은행까지 바꿔야 할 만큼 온갖 사연들이 있었다. 나는 내 오만했던 생각을 상기하며, 그들에게 최대한 도움을 될 수 있게 상담했다. 그리고 나도 나의 나르시시스트에게 맞는 도망 전략을 세웠다.
나르시시스트를 대하는 자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