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르시시스트에게서 도망친 임상심리사입니다.
전화를 피한지 한 달쯤 지나서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나의 나르시시스트가 자신이 잃어버린 대상을 다시 찾으러 올 (후버링) 결심을 한 것이다. 평소에는 한두 번의 부재중만 남기고 말았을 테지만 그날은 아니었다. 30분마다 두세 번의 전화가 왔다. 싸한 기분이 들어서 친구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새벽에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집에 도착하니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월요일 새벽 5시라 그나마 다행이다. 곧 출근을 해야 한다. 나의 나르시시스트가 돌아가야 할 곳은 여기서 차로 3시간 반이 소요된다. 최소 한 시간 뒤에는 출발해야 한다. 그동안 세워 놓은 전략대로 1시간만 대처하면 된다. '네가 돌아가는 길이 멀어서 참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 잡고 차에서 내렸다.
"왜 이제 왔어? 누구랑 있었는데? 전화는 왜 안 받아?"나를 보자마자 한 말이다. 빨리 뒤는 심장, 울렁거리는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최대한 차분하려고 노력했다. "미안해 내가 잘 못했어. 얘기 좀 해" 나는 무표정으로 쳐다 만 봤다. 정확히는 생각할 시간을 버는 중이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얘기 좀 해" 바로 대화에 응하면 나르시시스트의 말도 안 되는 논리에 감정이 동요될 것이다. 이대로 무시하고 집으로 들어가면 따라오거나 불필요한 몸싸움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단호하고 냉정하지만 온화한 AI처럼 말했다. "나는 하고 싶은 얘기가 없어. 시간 없으니까 할 말 있으면 빨리 말하고 가." 그리고 시계를 계속 보면서 너랑 대화할 시간도 마음도 없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그렇게 1시간 동안 나의 나르시시스트가 뭐라고 하든 나는 이 말만 되풀이하며 이 태도를 유지했다.
나르시시스트를 대할 때는 회색돌 기법으로 알려진 그레이락(gray rock)이라는 기술을 사용해야 한다. 그렇다 이건 기술이다. 기술이라는 말은 사용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레이락 기법은 대화형 Ai가 된다고 생각하면 쉽게 가능하다. 감정은 배제하고 이성적이고 중립적이며, 사실에 기반한 답변만 반복적으로 하면 된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말과 행동에 상대방의 감정이 좌지우지되는 것을 좋아한다. 나르시시스트가 가장 원하는 것은 타인의 감정이다. 이는 단순히 칭찬과 찬양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타인의 어떠한 감정이든 우월감을 느낄 수 있다.
상대방이 자신의 행동에 의해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해도 좋아한다. 예를 들어 위와 같은 상황에서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연락하지 마! 찾아오지도마!"와 같은 감정이 들어간 말을 한다면 나르시시스트에게 정서적 에너지를 공급한 샘이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상대방에게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화를 내거나 감정적 호소를 한다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가 상황을 해석하는 방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우리는 상대방이 화를 내거나 거부반응을 보이면 '내가 뭘 잘못했나?'라는 생각을 먼저 한다. 그리고 나의 잘못의 유무와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상대방이 나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해석한다. 즉, 상대방이 현재 상황을 불쾌해한다고 인식한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상대방의 부정적인 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에 우월감을 얻는다. 그러니 무미건조하게 할 말만 되풀이하는 Ai에게 나르시시스트는 얻을게 아무것도 없다. 그들에게 우월감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은 산소 공급이 중단된다는 의미이다. 그들에게 우월감은 생명과도 같다. 지속적으로 산소 공급을 중단하면 살기 위해서 다른 공급원을 찾아 떠날 것이다.
그레이 락의 또 다른 효과 하나는 사람을 등급으로 나누는 나르시시스트에게 어려운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들에게는 두가지 종류의 타인이 있다.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과 자신이 우위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면 함부로 하지 못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어떤 사람을 어려워 할까? 자신에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의 어떠한 행동과 말에도 타격이 없는 사람을 가장 어려워한다. 그들에게 어렵다는것은 자신보다 우위에 있다는 의미이다. 실제로는 타격을 받았어도 무덤덤하게 보여지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어려운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레이락이라는 기법은 그들을 대하는 자세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나르시시스트를 교정하고 변화 시키는 방법은 아니다. 나르시시스트가 어려워한다고 해도 언제든지 평가절하 하면 공격 할 수 있다. 그런 공격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사용 해야한다. 나르시시스트와의 관계에서 궁극적인 목표는 정서적 공급을 지속적으로 차단해서 점차적으로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는 이유는
나의 취약점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