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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추장와플 Oct 13. 2024

벨기에 빈민가 도서관의 동양인사서

매일매일 상상초월 대환장 파티


공무원 부적격 판정과 옴부즈만 민원을 거쳐 신문고를 치는 데 성공하여 재 배정받은 외국인관리청에서 외국인들을 추방하며 지내던 어느 날, 스트레스로 인하여 양수가 터져버렸다.  아기는 3주 먼저 나왔고, 쓰러져 가는 집은 아직 고치지도 못한 채,  벽만 간신히 서 있는 집에서 아기와 세 달을 보냈다.

 즈그 애미 닮아 성격이 급한 아기는 집이  아직 이런데 너무 빨리 나와버렸다. 아기 나오기 직전의 실제 우리 집.


시간은 흘러 흘러 3개월이 지나 출산휴가는 끝났다.


아기는 저체중으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잡초 같은 엄마를 닮아서인지 쑥쑥 잘 자라주었고, 이제 다시 전쟁터 같은 곳으로 돌아가 일을 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생각도 하기 싫었다. 다시 나가서 뺨다구를 맞을지 모른 채 불안 해 하며 일을 해야 한다니.


아기를 처음으로 어린이집에 데려다주었다. 3개월, 아직은 핏덩이인데 벨기에에서는 많은 아이들이 3개월부터 어린이집에 간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고 자꾸 눈물이 나려 했다. 아기를 건네주고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린이집 선생님은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3개월이니까 아직 어린것 같죠? 근데 얘는 3주 된 애예요." 라며 3주 된 아기를 보여준다. 아직 엄마가 누군지도 모를 나이... 그래서 낯가림도 하지 않는다.


"얘 엄마는 자영업을 해서, 어머님처럼 3개월간 산휴가 쓸 수가 없어요."라고 하니, 죄책감이 조금이나마  덜해진다.


벨기에에서는 임신사실을 알자마자 어린이집 찾기 전쟁이 시작된다. 어린이집 수는 한정되어 있고, 일을 하러 나가야 하는 부모들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어린이집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출산 휴가가 끝나기 전에 어린이집을 못 구해 출근을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다행히도 나는 다시 일을 나가기 전에 어린이집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출근을 했다. 그리고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매일매일 치러지는 추방명령 고지와 화로 가득 찬 사람들... 나는 점점 지쳐갔다. 또다시 매일 울면서 집에 왔다. 단언컨대, 이 일이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일이었던 것 같다. 몸을 쓰며 공장에 나가 하루종일 일을 하는 것보다, 이 일이 몇 배는 고통스러웠다.


동료들은 정말 따뜻하고 찐 의리를 보여주는 이들이었지만, 동료들의 의리만 보고 이 일을 평생 하다간 추방명령받은 사람들이 고국 가기 전에 내가 먼저 삼도천 건널  것 같았다.


1년 정도를 그렇게  매일매일 쳐 울며 삼도천 방향으로 다가가고 있던  와중에, 시공무원 사내 포털사이트에 새로 올라온 구인공고가 눈에 띄었다.


새로 기획된 한시적인 프로젝트인데  4가지 부서를 체험한 후, 1년 후 가장 자기에게 맞는 부서를 고르고, 해당 부서에서도 그 사람을 원하면 그곳에 배정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벨기에 직장판 사랑의 스튜디오랄까?

나는 이때가 기회다라고 생각하고 나의 생명줄과 같은 그 프로그램에 지원을 했다. 지원자는 나 이외에 6명이 있었고 지원자 모두가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각자 다른 부서로 배정이 되었다. 로테이션으로 3개월마다 다른 부서로 옮겨 다니며 일을 했는데, 어떤 일을 해도 외국인관리청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여기 있다가는 아마도 내 명은 고사하고 당장 다음 달 초에 죽을 것 같았다.



처음 3개월은 도시관리과였다. 그곳에서 오래된 행정 문서를 시스템에 옮기고 스캔을 했다. 끝없는 삽질이었다. 무언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었지만, 부서에 남을지 안남을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삽질 이외의 일은 맡겨주지 않았다. 3개월을 채우자마자 나는 줄행랑을 쳤다.


 그다음 3개월은 극 성수기 여름의 공립 야외수영장 계산원이었다. 내가 털 많은 색목인들의 몸뚱아리를 보려고 태어났는가 싶어 현타가 왔고 여기도 3개월 채우고 빛의 속도로  줄행랑!

3개월간 일하고 빤쓰런한 야외수영장


그다음은 문화재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이라는 공간에 분명 매력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3개월이 지나고 공공도서관으로 가는 선택을 했다.  해리포터에 나올 듯한 아주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라틴어와 네덜란드 고어로 된 장서가 가득한 문화재 도서관은 나 같은 외국인에게는 장래의 성장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예시를 들자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인쇄본인 직지심체요절을 기려 만든 청주고인쇄박물관에서 뚱딴지 같이 벨기에인이 일하는 격이라고 해야 할까?

Hendrik Conscience 문화재 도서관의 Nottebohmzaal


그리고 마지막으로 배정받은 곳인 앤트워프시의 공공 도서관.  드디어 찾았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을...  그곳에서 일하는 3개월 내내 보람을 느끼며 일했고, 3개월이 지나 나는 그곳에 남겠다고 결정했다. 도서관에서도 나에게 남아 달라고 했고, 그렇게 해서 우리의 사랑의 작대기는 매칭이 되었다.


앤트워프에는 중앙도서관 이외에도 동 별로 작은 도서관들이 여럿 있었는데, 내가 5년간 몸 바쳐 일했던 도서관은 난민들과 중동 이민자들이 사는 게토의 한가운데 있었다. 아주 작은 도서관으로 동료 세명과 함께 도서관을 꾸려나갔다. 나는 어린이교육담당 사서가 되어 각종 독서 관련 이벤트들과, 인근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도서관 방문을  매월 단위로 계획했고, 작가들에게 도서강연을 요청하고, 어린이들의 독서장려 프로그램을 짜는 역할을 했다.

내가 5년간 일했던 게토 한복판의 도서관
인근 초등학교 아이들을 대상으로 작가 강연을 기획했다.


말만 듣고 보면 오, 할만하겠는데!라고 하겠지만, (그래도 외국인관리청을 벗어나 정말 감사하다. )


미는 있는데 중노동이다. 게다가 감정노동에 베이비시터 역할까지 해야 한다. 게토는 인구밀도가 매우 높다. 나 포함 도합 3명의 사서가  인근 초등학교 72개 학급의 도서관 방문과 대여와 반납, 그리고 책을 제 자리에 다시 꽂아 놓는 역할까지도 소화해야 했다.

내가 일했던 도서관에서 어린이들에게 방과 후 책 읽어주는 프로그램. 이 동네 엄마들은 대부분 이 나라 말을 하지 못한다.

 

학교가 끝나면 게토의 좁아터진 정부지원 영세민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몰려온다. 대게 이슬람가정들은 아이를 보통 셋 이상 낳는데 영세민 아파트이니 공간이 충분할 리가 없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밖에서 나가 놀라고 하고, 게토이니 도서관 이외에는 이 아이들에게 안전하고 따듯한, 비바람을 막아 줄 곳이 없다. 배트맨의 고담시티를 능가하는 벨기에는 1년에 200일 이상 흐리거나 비가 온다.


게토의 메인 거리, 여기는 아랍이 아니고 정말로 벨기에입니다. 사진에서는 깨끗하고 잘 정리된 것처럼 보이나, 돈세탁과 마약거래가 판을 치는 거리다.
도서관 맞은편의 영세민 임대주택단지, 다 쓰러져 가던 내 집( 사진 1) 보다 나은 건 무엇?


학교가 끝나면 아예 집에도 가지 않고 가방을 메고 바로 도서관으로 와서 도서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버팅기는 아이들도 부지기수였다.  아이들과 놀아주고, 말 상대를 해주느라 막상 본인 새끼는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집에 가서는 넉다운이 되었다. (내가 정말 힘들 때, 내 새끼를 자기 새끼처럼 보살펴 주었던 친구 J에게 특별히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다.)


또한 네덜란드어를 못하는 난민들이 수시로 와서 정부로부터 받는 문서들을 사서들에게 쉽게 설명해 달라고 부탁하러 오기도 했고, 비행청소년들이 마약을 거래하기 위해 도서관의 공공 와이파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서관에서 언더커버 형사들이 잠복도 했다는 건 어차피 지난 일이니 안 비밀!


라마단 기간에는 낮 동안 밥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와서 괜히 온갖 행패와 짜증을 부리고 가기도 했다.


게다가 동료 한 명이 숨은 빌런이었다. 그 도서관에는 상사가 없었는데, 출근해서 하루 종일 주방과 사무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우아하게 차만 마셔댔다. 그래서 이 많은 일들을 나와 J라는 동료 두 명이서 처리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도 손이 빠른 편이고,  동료 J도 1.5인분의 일을 해냈다.   




정말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났지만 정말 잊지 못하는 한 가지가 있다. 도서관에 자주 오는 12세가량의  모로코계 이민배을 가진 노아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엥? 노아의 방주, 그 노아 말하는 건가라고 하시면 딩동댕! 이슬람 경전 코란은 구약성서를 뿌리로 삼고 있다.) 쫌 껄렁대고 쎈 척하는 중2병 아이인가 보다 하고 그냥 넘기려 했는데 어느 날은 너무 심하게 떠들고 다른 아이들에게 위협까지 가했다. 그래서 "좀 조용히 좀 할까? 여기 너만 있는 건 아니잖아."라고 했더니 날 더러 " 더러운 중국 창녀"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노무새끼가 어디서 뚫린 입이라고 이런 막말을... 선을 넘었다. 아주 많이 넘었다. 마음 같아선 등짝스매싱을 선사해 주고 싶었지만 남의 집 자식이라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내가 누구인가, 예절을 중시하는 유교녀가 아닌가! 부모한테 가서 말해야겠다 생각하고 도서관 회원정보를 뒤져 그 아이 집주소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 집으로 갔다. 이 중2병 걸린 아이의 부모는 자기 아들이 밖에서 저러고 다니는 걸 알고 있을까.


내가 노아의 아버지였더라면 아마도 이렇게 해 주지 않았을까.


띵동, 벨을 누르고 기다렸더니 히잡을 한 젊은 여자가  나온다. 나는 요 앞의 도서관 사서이며 노아 때문에 상의할 것이 있어서 왔고 부모님과 이야기할 수 있냐고 물었다.


그 젊은 여자는 노아의 누나였고, 지금 부모님은 여기 없으니 자기한테 말하라 했다. 그래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이런 말은 여자로서, 소수인종으로서,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서 어느 한 가지로서도 받아 들 일 수 없는 일이고, 그 아이로부터 사과를 바란다고 말했다.


노아의 누나는 부모님께 전하겠다고 했다. 그 이후로 한 동안 중2병 제대로 걸린 노아 보지 못했다. 한 일주일이 지났을 때, 어느 중동계열 중년남자가 내 동료 J를 구석에 데려가 뭐라 뭐라 쑥덕쑥덕한다. 그리고 그 남자가 돌아 간 후, 동료 J는 이 말을 전했다.


"저 사람 노아의 아빠였는데, 자기 아들이 너한테 그런 거는 유감이고 중국사람들 성깔 있는 사람들이니까 조심해야 한다고 단단히 일렀대."


맙소사... 이 말이야 방구야.


"그 사람 제정신 맞아? 근데 그건 그렇고 왜 나한테 안 오고 너한테 갔는데?"


"내가 남자니까. 저 사람 모로코 사람인데, 여자한테 사과를 어떻게 하겠어? 그러니까 나한테 대신 말한 거지."


그렇게 나는 상상치도 못했던 역대급 막말사과를 남을 통해 받았다. 그 이후로도 노아 한 동안 보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을 통해 노아소식을 물었더니, 소년원에 갔다고 했다. 학교에서 다른 학급의 아이와 커터칼로 싸웠다고 한다. 좀 많이 놀랐지만 그 아이의 아버지와 노아를 보며, 이민 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살아가는, 교육 수준이 높지 않은 이민 가정의 2세대와 3세대의 삶이 쉽지 않음을 느꼈다.




몸은 너무 지치고 힘들었지만, 도서관에 오는 거의 모든 아이들의 이름을 외웠고, 그 아이들과 깊은 유대감을 느꼈다. 나는 그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빨리 게토 이민자가정의 굴레를 벗길 바랐다. 여자아이든, 남자아이든 책을 읽고 공부를 하길 바랐다. 그래서 나는 이 아이들에게 숙제도 내어주고, 책도 읽어 주는 방과 후 도서관 선생님이 되었다.


벨기에 전통 산타할아버지 기념일에 맞추어 아이들과 함께 종이가방을 꾸몄다. 벨기에 산타는 밤에 여기에 귤과 벨기에 전통쿠키를 넣어두고 간다.


그곳을 나온 지 벌써 5년 가까이 되었지만 가끔 우연히 성인이 된 그 친구들을 길에서 만나면, 그 아이들은 나를 기억하고 반가움에 나에게로 뛰어와 서로 얼싸안고 인사를 한다. 며칠 전 지금 근무하고 있는 대학 도서관에서 꼬맹이시절 얼굴이 아직 남아있는  한 녀석을 보았고, 고맙게도 먼저 정말 너무 오랜만이라며 아는 척을 해 주었다. 대학에 와서 공부를 한다니 마치 나는 엄마처럼 기뻤다.


일도 무지막지 하게 많았고, 넉다운이 되어 쓰러지는 날도 많았지만 내 삶의 방향을 찾은 것 같았다. 물론 한국에서도 교사가 되려고 집에서 먼~ 교육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여자직업으로는 교사가 최고라는 아버지의 뜻이 더 컸다. 신사임당도 울고 갈 엄격한 유교하우스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차만 마셔대는 동료는 제외하고, 나 동료 J는 죽도록 몸 바쳐 일을 했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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