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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추장와플 Oct 20. 2024

아기 안고 울면서 한 대학원 공부

못 다한 공부의 한을 풀다

못 다한 공부의 한이라니, 마치 팔순의 할머니가 하는 말 같지만 나의 과거를 살펴 보자면


한국에서 교육대학원 다니다 2학기 남겨놓고 결혼하여 벨기에로 이주, 그 결과는 중퇴,

벨기에 온 지 얼마 안되어 호기롭게 문화경영대학원 등록하여, 되도 않는 네덜란드어 실력과 학창시절 수학과 담 쌓고 산 죄로, 다시 중퇴,

나름 적성에 맞았던 브뤼셀 자유대학 미술과학대학원, 임신과 출산으로 다시 중퇴


이쯤되면 중퇴계의 떠오르는 샛별이다.


김선태 주무관님은 공무원계의 떠오르는 샛별, 나는 중퇴계의 떠오르는 샛별? (진심으로 팬입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공부했던 대학원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빈민가의 도서관 일에 치이고, 육아에 치이고, 다시 돌아 갈 가망성이 없어 보였다.  일을 하며, 아기를 보며, 브뤼셀에 있는 대학원에 기차를 타고 다니며 공부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나는 또 다시 공부를 접기로 했다.


인생은 삼세판, 그런데 세번 다 실패다. 뭐 그까잇거 그냥 삼세판 안되면 사네판 하면 되지.


나는 졸업장이라는 종잇조가리의 신봉자이다. 구구절절히 한국에서 뭘 배웠고, 뭘 했고 어쩌고 저쩌고 설명하지 않아도, 이 나라에서 받은 학위 한방에 그냥 해결되는 그런 명.쾌.함! 나는 그것을 원했다.


너무 갖고 싶다. 너를...



무슨 로맨스 소설의 제목쯤이나 될 것 같은 이 말은 내가 딱 하고 싶은 말이었다.  다만 남자가 아니라 벨기에의 학위였지만.


공공도서관 사서는 대학졸업장이 필요 없는 직종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장만 있어도 충분했지만, 그래도 대학원졸업장, 아이원츄!! 현재는 이 일이 재미 있지만, 내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 지는 모르는 일이다. 인생의 풍파는 언제든 닥쳐올 수 있으니 미리미리 대비를 해 놓아야 한다. 그간 내가 겪은 일을 되돌아 보면 지 풍파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내 쎄한 느낌은 맞았다. (다음화에  커밍쑨)

 

강남역에 물난리가 났을 때 수문을 견고하게 만들어 노아의 방주라 불린 곳이 있었으니, 나에겐 벨기에 학위가 노아와 방주와 같았다.


그러던 중, 앤트워프대학 대학원과정 중 문헌정보학을 발견했다.  게토의 도서관에서 근무하며, 사서라는 일이 나에게 맞는 일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서가 좋았던 이유


직업이름으로 하는 일을 유추 가능 (무슨 일 하세요? 회사원이에요. 어떤 직장 다니시는데요? 회사에서 무슨일을 하시는데요?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다. 졸업장이 좋은 이유처럼, 나는 구구절절 설명하는것을 싫어함. 그냥 사서는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끝)

초등학교 앞, 뽑기 같은 도서관의 책들. (책으로 가득 찬 도서관에서 인생서적을 만나면 인생리셋 가능)

뭐가 잘못 되어 봤자, 그래봤자 책이다. 외국인관리청에서 추방명령 고지하는 일은 남의 인생 박살낼 수 도 있지만, 사서는 잘 되도 책, 못 되도, 그래봤자 책이다. 그런데 그래봤자 책이지만, 위에 쓴 바와 같이 인생서적을 만나면 인생이 바뀔 수도 있다.

책은 아무런 죄가 없다. 도서관에서 거지같은 일이 생기면 그것은 100프로 사람이 죄다. 책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무고하다.

도서관은 마치 인생의 뽑기판 같다. 상품으로 얻은 영감으로 인생리셋이 가능하다.


혹시라도 문헌정보직종의 다른 곳에서 일 할 수 있는 기회가 올 수도 있고, 정글과 같은 벨기에에서 나를 지켜줄 수 있는 무기 하나는 구비해 두는 것이 안전을 도모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벨기에의 출산휴가는 3개월이지만 그 이후에 육아휴직을 할 수 있다.  육아휴직을 한번에 쓸 수도 있고(4개월간 내리 일을 쉴 수 있다), 나누어 쓸 수도 있는데 나는 20개월간 일주일에 1일을 일을 하지 않고 대학원 수업을 받으러 가는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대학원은  2년 과정이었고, 20개월 이후 모자라는 기간은  내 연차를 갈아넣었다.  아기와 함께 하라는 취지의 육아휴직을  취지에 맞게 쓰지 않고, 공부를 하러 간다는 것이 정말로 아기에게 미안했지만 아기의 안정된 미래를 위한 투자이며, 엄마의 행복이 곧 아기의 행복이라는 마음으로 나는 그렇게 대학원에 등록했다.




문헌정보학이니 아무래도 도서관근무 경험이 있으니 좀 낫지 않을까 기대를 하며 시작한 공부인데 이게 웬열!


일하며, 육아하며, 공부를 하다니. 나는 정말 또라이였나, 왜 이런 선택을 했나... 또 다시 현타가 밀려왔다. 뭔놈의 과제는 그리 많고, 읽어야 할 책은 그리 많은 것인가. 역시 빡세다, 벨기에 대학.(유교걸 벨기에 생존기 17화, 개나소나 다 들어가는 벨기에 대학 참조)


네덜란드어로 된 책을 읽는 속도도 모국어를 사용하는 학생들에 비해 현저히 낮아서 벼락치기는 할 수 조차 없었다. 매일매일 해야 할 페이지를 정해서 꼭 끝내고 자야했다. 주중에는 퇴근후 아기를 안고 쳐 울면서 공부를 했다. 남의편씨는 밤에 나가 일을 했고, 주말에도 나가 콘서트에서 연주를 했기 때문에 거의 독박육아에 가까웠다.( 남의편씨 본캐는 뮤지션, 부캐는 베짱이)주말이면 아기를 데리고 시부모님댁에 가서 아기를 맡겨놓고 다락방에 쳐 박혀서 공부를 했다. 그래도 아기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수강했던 과목들을 다시 회상해 보면, 내가 그걸 어찌 했는가 싶다. 그때는 정말 간절했고, 그 간절함이 마술을 부린 듯 싶다. 문헌에 과한 과목들도 많았지만, 컴퓨터 네트워크 테크놀로지, 정보의 구조화, 정보의 검색 등등의 문과랑은 좀 거리가 머~~~언 과목도 많았다.


수학 없는 줄 알았는데, 나는 또 다시 빌어먹을 수학과 만나고 말았다. 문헌정보학은 "정보학"이었던 것이다. 문과라고 수학과 38선 긋고 절대 왕래하지  않았던 나의 학창시절에 또 다시 한번 물 밀듯 후회가 밀려왔다.


저작관련법도 공부를 해야했는데 법이 여기서 왜 나오나.  게다가 교수님은 왜 이렇게  목소리에 높낮이가 없나. 잘자라 우리아가...이렇게 들린다...눈이 감긴다...아기가 새벽까지 우는 바람에 나는 정말 극도로 피로했다. 아기는 거의 매일 새벽에도 깨서 울어댓고, 공부하랴 나가서 일 하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기를 위해 써야 할 육아 휴직을 나는 벨기에 학위를 위해 쓰고 있었으므로 아기에게 너무 미안했다. 하지만 어차피 하기로 한 것, 아기가 준 기회에 보답하기 위해 이번에는 중퇴를 하면 안되었다. 이번에도 중퇴로 끝이 나게 된다면 아기를 본 면목이 없었다.


중퇴라는 파국만은 막아야 했다.


대학원 과정의 반 정도가 지났다. 나는 앤트워프 대학에서 문헌정보학 창설 이후,  최초의 모국어가 네덜란드어가 아닌 학생이자 최초의 동양인이었다. 학생수는 처음엔 대략 80명이었는데, 반 정도가 지났을 때는 어느덧 절반정도로 떨어져 나갔다. 나는 다행히도 아직 달랑달랑 거리며 붙어있었다.


나만 "문송합니다" (문과여서 죄송합니다)를 외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학생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수학설명을 하고 있던 강의 중의 교수님에게 막말을 하고 나간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교수님이  성적으로 몇점부터 몇점까지는 똑똑한 학생, 그 다음 점수군은 머리가 그래도 좀 돌아가는 학생, 그 다음군은 일반인, 그 다음군은 머리가 나쁜사람이라 했고, 언어전공 학생들은 후자인 두 그룹에 속한다는 막말을 시전함)


어느 과목에서는 자가학습 시스템을 구축하라 했는데, 나는 정말로 아는게 없었다. 그러나 내가 잘하는 것은 삽질, 다시하라고 하면 못할 삽집끝에 그럴싸한 자가학습 시스템도 만들었다. 지금 하라면 당연히 못한다. 그때는 절박했으므로 가능했다. 조별과제였는데, 이 소심한 벨기에 조원들은 참으로 소심하여 과제발표때도 내 등뒤로 숨었다. 얼굴에 철판깔기의 천재, K-아줌마가 총대를 매고, '나는 최선을 다해 너네 나라 말로 해 주고 있으니 내 네덜란드어가 구려도 알아 듣던지 말던지.'라는 마음가짐으로 조장이 되어 발표도 했다. 아니, 하고 많은 네덜란드어 모국어자중에 왜 외국인인 내가 이걸 해야하지? 라고 생각했지만 교수님께서 내 모습을 기특하게 여기셨는지 좋은 점수를 받았다.

K 아줌마 사전에 쪽팔림 따위는 없다. 랄랄님의 아줌마 부캐, 너무 좋아!

정말 힘들게 공부했다. 죄책감도 많이 느꼈지만, 그 죄책감이 절대 포기 할 수 없게 만들었고 , 정말 피말리는 2년을 뒤로하고 나는 중퇴계의 샛별 타이틀에 작별을 고했다. 드디어 그렇게 갖고 싶어하던 대학원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1852년에 천주교 예수회에서 설립한 경제학과가 앤트워프 대학의 뿌리이다. 이곳에서 네덜란드어도 배우고, 공부도 하고 일도 하니 이곳과 인연이 참으로 깊다.

참 오래 돌아왔다. 내 적성에 맞는 일을 찾는 것도, 벨기에의 학위를 손에 넣는것도... 하지만 나에겐 모든 순간이 배움의 연속이었고 그 배움에 감사한다.


이제 꽃길만 걸을 일만 남았겠지?라고 생각했다. 모든게 핑크빛으로 보였으나, 그것은 나의 대단한 착각이었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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