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민가의 도서관에서 동료 J와 함께 몸이 부셔저라 일하고 있던 와중, 상사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직원이 딱 셋인데 상사가 왜 필요하지라고 생각했지만, 높으신 분들이 결정한 일인데, 일개 말단 공무원의 생각이 무슨 소용인가. 이미 정해진 수순대로 그 인간은 왔다.
금발에 파란 눈, 마르고 예쁜 얼굴, 생글생글 웃는 미소는 왠지 엘프를 생각나게 했다. 친절한 말투로 자신을 H라 소개했다. 친절하긴 한데 왠지 쎄한 느낌... 나의 레이더는 정글 같은 벨기에살이 덕분에 위험을 탐지하는 능력이 최적화되어 있었다. 설명은 할 수 없다. 왜 쎄한지는... 그런데 나의 레이더는 대략 90프로 이상의 적중률을 자랑한다.
삐용삐용. 전방 1미터 앞 싸이코가 감지되었습니다.
내 레이더는 적중했다.예쁜 얼굴을 한 그 싸이코엘프는 처음에는 일은 안 하고 차만 열심히 마셔대는 동료를 다른 곳으로 보내버렸다. 사실 이때까지는 좋았다. 일 잘하는 유능한 동료가 와서 제대로 같이 일을 하면 훨씬 나을 것 같았는데, 문제는 이 여자의 기본 성향 자체가 사람을 쥐어짜는 데 있었다.
우리 도서관은 다른 도서관에서도 3D업장으로 유명했다. 애들이 한번 들어오면 깜깜해질 때까지 나가지를 않고, 온갖 범죄가 도서관 근처에서 일어나고, 인근 학급 도서관 방문은 총 10명이 넘게 일하는 구립 도서관보다 2배는 많았다. 명목상 3명이, 실제로는 2명이 그 많은 수의 인근 학급 도서관을 커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엘프녀 상사는 우리가 하는 일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고, 더 많은 학급을 받아라, 도서관 방문 때마다 독서를 장려하는 액티비티를 만들어라 쥐어짜 댔다. 사람이나 충원을 시켜주고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말을 안 한다. 자기는 오후 4시가 되면 칼퇴근을 하고 우리는 정말 소처럼 일을 해야 했다.
저기 있는 소 두 마리는 마치 나와 나의 동료 J 같다.
어차피 소처럼 일하는 것은 벨기에에 온 이후로 계속된 일이라, 힘들어도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엘프녀의 의심병은 사람을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들었다. 메일을 쓰는데, 옆에서 계속 지켜본다거나 출근시간, 점심시간, 퇴근시간도 다 분 단위로 체크를 했다.
그리고 차만 마셔대던 동료를 대신해 새로 온 동료도 1년 만에 자기 말을 순순히 듣지 않고 자기 의견에 반대를 했으며 인격모독을 했다고 인사팀과 함께 상벌위원회를 열어 아예 공무원을 그만두게 만들었다. 사실 그 동료도 잘한 것은 없다. 그 여자한테 막말을 퍼부었으니 말이다. 이 여자가 인사팀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몰라도 그 철밥통이라는 공무원이 잘릴 정도면 정말 인사팀과 쿵짝을 참 잘 맞추어 한 사람의 뿌리를 뽑아내려 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물론 새로 온 동료도 그다지 일을 소처럼 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한 가정의 가장이자, 한 사람의 아버지를 전근을 시키기보다는 아예 잘라버렸다는 게 참 인간이 못돼 처먹었다.
게다가 그 작은, 직원 달랑 세명인 도서관에서 일주일에 2회, 두 시간 반씩 회의가 웬 말인가. 게다가 회의 중에는 의견을 내기보다는 초등학교 숙제검사하듯, TO DO 리스트를 하나하나 검사했는데 만약 끝내지 못했으면 그 변명을 동료들과 모두 함께 있는 그 자리에서 해야 했다. 거의 공개처형이었다.
어느 날은 뜬금없이 자기는 사회복지학을 공부했다며, 네가 딴 문헌정보 학위는 공공도서관 채용에는 없어도 되는 쓸데없는 학위고, 이런 빈민가의 도서관에서는 사회복지학이 더 쓸모 있다며.. 아니, 누가 물어봤냐고요.
내가 뭘 하기만 하면 이렇게 하면 안 되지 라며 꼬투리를 잡았고, 마지막은 항상 이것 봐. 내가 하라는 대로 하니까 훨씬 낫잖아라며 자기는 똑똑하고 나는 바보가 되어야 직성이 풀렸다.
이렇게 가스라이팅을 1년 이상을당하다 보니, 급격하게 무기력하고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도서관이고 뭐고, 그냥 사는 게 싫고 힘들어졌다. 나는 내가 이렇게 우울한 사람인 줄 몰랐다. 의지 하나만 가지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그 여자 얼굴을 보면 숨이 콱콱 막혔다. 그 여자랑 한 공간에 있으면 소화도 안 되고, 식욕도 없었다(내가 식욕이 없어졌다는 것은 정말 싫다는 거다).
물에 젖은 이불처럼 몸도 마음도 축축 처지고 무거웠다. 결국 의사에게 가서 우울증 약을 처방받아 복용하기 시작했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더니 그 싸이코엘프가 온 이후 몸 여기저기가 아프기 시작했고 수술도 한 차례 받아 나는 쓸개도 없는 여자가 되었다.
우울증 약 때문에 하루종일 멍했다. 우울감은 덜해졌지만, 기쁨도, 즐거움도 없어졌다. 어느 날 차를 운전하고 집으로 가다가 정신이 너무 멍해 주차되어 있는 차를 들이받았다. 그리고는 이러다가 정말 내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미친 싸이코엘프를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 여자에서 벗어나기 위해한 단계 더높은 자리의 공무원시험도 보았다. 그 시험은 최말단 공무원처럼 쉽지는 않았지만, 지문을 읽고 답하기, 메일을 정중하게 답하기 기타 등등 그다지 까다롭지 않은 문제들이었다. 두 번을 시도했는데, 두 번 다 필기에서는 붙었지만, 면접에서 떨어졌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한 번은 너무 자기주장이 없다고 떨어졌고(내가?) 한 번은 자기주장이 강하다고 떨어졌다. 왜 정 반대의 결과가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의심이 가는 구석이 있다.증거가 없으니 그냥 나의 추측이다. 공무원 부적격 판정사건 때문에 인사팀의 관계자들이 시의원들과 옴부즈만에게 탈탈 털린 것이 화근이 되지 않나 싶다. 어쩌면 나는 인사팀의 블랙리스트에 절대로 진급시켜서는 안 될 사람으로 올라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벗어나고 싶은 것이 간절한데, 시험에서 두 번이나 떨어지니 더 우울해졌다. 가스라이팅이 이렇게 무서운 지, 그때 깨달았다. 사람을 뿌리부터 망가트린 다는 것을... 내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간 내가 걸어온 길도 다 별 볼일 없는 것처럼 느껴졌고, 잡초 같던 나는 사라지고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산전수전 다 함께 겪고 전쟁통의 전우 같았던 나의 동료 J는 그 여자의 가스라이팅에 못 이겨 결국 자기 급수보다 더 낮은 곳이라도 자리가 있는 곳 아무 곳이나 가겠다고 자원했다. 전근을 가는 것은 가능하지만, 빈자리가 있어야 가능했는데 같은 급수에서 갈 수 있는 자리가 없으니 낮춰서라도 그 여자를 벗어나려 한 것이다.
그냥 여길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갈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우울증이라는 것이 참 독했다. 뭔가를 하려고 하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기운이 바로 빠져나가 버렸다. 나는 어찌해야 할 지도 모르고 하루하루 점점 더 깊은 곳으로 가라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