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꼬리와 닭의 머리 중 어떤 것이 되는 게 더 나은가? 하고 묻는 다면, 나의 대답은개취존중(개인의 취향 존중)이다. 주목받길 원하고, 나 정도면 괜찮지 않아?라고 느끼고 싶다면 닭의 머리도 좋다. 하지만 개인적인 선호를 묻는다면 나에게는 용의 꼬리가 낫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다닌지 벌써 5년째가 되어가는 똑똑한 놈들로 가득 찬 현 직장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내가 근무하는 학술도서관은 지상 3층, 지하 3층, 직원은 50명이다. 최저학력이 학사, 석사는 아무나고 박사도 수두룩 빽빽이다(이번생의 승진은 물 건너 갔다, 공부는 이제 안 하고 싶다). 언어학, 역사학, 철학, 생물학등 분야도 참으로 다양하다. 고졸 졸업장만 있으면 되었던 시의 도서관과는 다르다.
한국처럼 대다수가 대학을 가는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기본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능력의 차이에 있어 고졸과 대졸은 하늘과 땅차이다. 이전에 근무했던 앤트워프시의 도서관은 대졸자의 비율이 아주 낮아서 나는 몇 안 되는 대졸자 중의 하나였다. 대졸자라고 돈을 더 주느냐, 그건 아니지만 대졸자에 대한 업무 기대치는 높아서 돈은 똑같이 받아 놓고 소처럼 일을 해야 하는 일이 자주 생긴다.
평균학력이 석사인 직장으로 오고 나니, 다들 자기 할 일을 알아서 찾아서 한다. 상사들도 직원들을 쪼지 않는다. 알아서 잘하겠지 이런 식이다. 내가 해야하는 일만 잘하면, 다른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사실 일도 이곳에서는 농땡이를 부리며 느긋하게 한다. 아무도 쪼지 않는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러하다.
학술도서관에서는 언어가 중심에 있지 않고, 학문이 중심에 있다 보니 전 세계에서 공부하러 온 학생들과 교수들이 온다.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온 학생들은 아주 강한 악센트가 들어간 영어 혹은 네덜란드어를 사용하지만, 아무도 발음이 별로라고 멍청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어는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일 뿐, 가장 중요한 것은 앎, 지식이다.
나처럼 성인이 되어 외국으로 온 경우에는 해당언어를 완벽하게 마스터할 수가 없다. 인지적으로는 매우 발달하여, 문법과 같은 내용은 빨리 습득하지만 발음과 유창함은 청소년기를 지나면 2차/3차 언어로 습득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와 같이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앎이 가장 중요하다는 진리는 외국인으로 사는 나에게 숨통을 틔워 주었다.
이곳에서 내 주요한 업무는 일상적인 대출과 반납 관련 사서 업무 외에도, 학생들에게 과학적인 글쓰기 워크샵을 해 주고, 도서관의 전시회의 커뮤니케이션, 보존서고의 습도와 온도관리와 리포트 기타 등등이다. 과학적인 글쓰기 워크샵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를 해야 하는데, 외국인으로서 2시간 동안 청중 앞에서 네덜란드어로 혼자 떠들어야 한다는 것은 나와 같은 철판얼굴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다. 외국인의 네덜란드어가 완벽해 봤자 얼마나 완벽하겠는가.
과학적 글쓰기 워크샵중. 두 시간 혼자 네덜란드어로 떠들면 정신이 가출.
하지만, 앎이 가장 중요하다는 진리, 그리고 언어는 앎을 전달하는 도구로 쓰이는 것일 뿐이라는 공통된 생각이 보호막이 되어 나를 보호해 준다.
또 다른 중요한 점 한 가지는,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굼벵이의 구르는 재주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내가 못하는 것을 너는 할 수 있고, 네가 못하는 것을 나는 할 수 있어. 우린 다 다르지만 너를 존중해.라고 말이다. 어떤 사람은 디자인에 소질이 있고, 어떤 사람은 얼굴에 철판 까는 것과 언어에 소질이 있고, (고추장와플을 생각하신다면 딩동댕!), 또 어떤 사람은 역사에 빠삭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다 다르지만 모두가 재주하나는 있다.
굼벵이의 구르는 재주와 같은 맥락으로, 다른 문화에 대한 포용력도 고학력일수록 높아진다. 내가 겪은 바에 의하면 학력이 낮을수록, 사회적인 계층이 낮을수록, 타문화에 대한 포용력이 적다. 다들 샌드위치 먹을 때 나는 김치찌개를 가져가서 냄새 폴폴 풍기며 먹어도 이들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한다.네 나라의 문화는 우리의 것과는 다르지만, 존중해. 라고 나에게 말은 직접 안 했어도, 나는 그 마음이 느껴진다. 내 주변에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도 평균의 벨기에 인들보다 잘 알고 있고, 한국 드라마를 즐기는 동료들도 많이 있다.
도서관 이용자들도 주로 학생이나 교직원이기에 내가 일했던 빈민가 도서관이나 구립도서관에 비교했을 때, 아주 젠틀하기 그지없다. 아, 물론 종종 사서를 자기네들 비서처럼 생각하는 예의 없는 재수탱이 교수들도 존재 하긴 한다. 하지만, 재수탱이 이용자들은 얼굴을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적은 수이다.
경력인정 또한 배운 놈들이 더 후했다. 앤트워프시에서는 업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경우에만 아주 깐깐하게 본 뒤에 경력으로 인정을 해 주었지만, 현재의 직장은 앤트워프시의 공무원으로 일한 모든 경력인정은 물론이고, 현재 업무와 아무 관련 없던 하루 일했던 벨기에의 공장(벨기에 공장 취직기)과, 삽질하며 버텼던 미국계 회사의 경력(워라밸 따위는 없는 미국계 회사에 취업했다)까지 경력으로 인정을 해 주어 비교적 높은 호봉으로 현 직장을 시작할 수 있었다. 잡초적 경험도 경력으로 인정해 줬달까?
솔직히 현재의 직장은 정말로 꿀 빠는 직장이다. 앞선 에피소드에서 여러 차례 썼듯이, 직장이 힘들면 힘들수록 동료와의 유대관계가 더 돈독한 법이다. 꿀 빠는 직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유대관계가 덜 돈독하다. 다들 배운자들이니, 하고 싶은 것도 많아 다들 바쁘다. 하지만 지난 에피소드들을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는 "안 돈독하면 그냥 쌩까지 뭐." 라고 할 사람이 당연히 아니다. 안 돈독하면, 돈독하게 만들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국인의 종특, 안되면 되게 하라!
돈독함 유지를 위해, 나는 부단히 노력을 하고 있다. 우리 팀의 먹는 것에 진심인비공식케이터링매니저로 피자, 태국음식, 터키음식 가리지 않고 동료들을 모아 함께 시켜 먹고, 집에서 음식 하나씩 해와서 서로 나눠먹기도 하고, 내가 직접 시크릿 산타도 기획해 마니또를 지정해 주기도 한다. 한 동료는, "네가 오고 나서 우리가 팀이라는 느낌이 처음으로 생겼어. 그전에는 우리 팀 진짜 재미없었는데..."라고 하며 나의 노력이 헛 되지 않았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동료사이 돈독하지 않다고 불평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면 되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 팀은 대학 내에서도돈독하기로는 1등이다.
동료들이 스탠실로 직접 만들어 준 비공식 케이터링 매니저 티샤쓰
회사 로드자전거 동호회 활동.오도방정 떨며 엑스칼리버 뽑으려는 자가 나/ 오른쪽은 동료들과 잡채만들기 시연중인 나.
나를 감사하게도 1등으로 뽑아주었으니, 면접 때 내가 말한 것에 대한 약속은 지켰다. 나를 뽑아주면 팀 분위기 하나는 책임지겠다고... 나는 은혜는 갚는 까치다.
내가 10년 후에 무엇을 하고 있을지, 이곳에 있을 지, 또 다른 곳에 가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도서관이 좋고, 여전히 방정 맞고, 이제는 농땡이도 부리고, 배운자들 사이에서 사랑받고 인정받으며, 내가 하고 싶은 일, 재미있는 일을 하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그렇게 잘 살고 있다. 외국인이 아니라, 그냥 그들의 유교녀로 말이다. 평소에는 웃기지만, 싸가지 말아먹은 학생들에게는 유교교육 시전하는, 특이하지만 재미있는 먹을 것을 사랑하는 그런 동료로...
어디에 있건, 중요한 건 될 때까지 해보겠다는 마음과,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것 두 개만 있으면 어느 곳에서든, 잘 살 수 있다.무슨 일이 닥치든, 나는 내가 잘 살아남을 것 이라 확신한다. 나는 똑똑한 사람도 아니고, 금수저 집에서 서포트를 잘 받으며 편안한 유년기를 보낸 사람도 아니다. 머리도 그냥저냥 중간정도 되는 것 같다. 한 마디로 그냥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범인이고, 잡초이다.
내가 그런 잡초이기 때문에 내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용기가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잡초들이다. 그 효용성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그런 잡초들 말이다.
그동안 유교녀 벨기에 생존기에 관심을 가져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잘 살아남겠습니다. -고추장와플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