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낮은 급수이지만 공무원 시험에 붙었다. 벨기에의 앤트워프시에 새로 문을 연 뮤지엄에 보안을 책임지고, 방문객들 방문 시 예술작품이 망가지지 않도록, 가까이 가거나 만지려고 할 때 주의를 주는 직책이었다.
최종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떨떨하고 믿기지 않았다. 외국공무원이지만 공무원은 공무원! 철밥통은 철밥통! 유럽도 공무원은 월급은 많지 않지만 안정적인 직장의 최고봉으로 인식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더니 안정적인 직장과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을 생각하니 너무 기뻤다. 조선멘탈 아버지께 이 사실을 알리니, 나라의 녹을 먹는 공무원이 되었다며 매우 기뻐하셨다. ( 아버지 뇌피셜: 최고의 직업은 나라의 녹을 먹는 일. )
앤트워프시의 MAS라는 뮤지엄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일 시작 전에 계약서에 서명하고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라는 공지를 받았다.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될 동료들도 만나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설레었다. 제발 화이트 트래쉬가 아니기를... (화이트 트래쉬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귓구멍에 딱지지도록 칭챙총 편 참조)떨리는 마음으로 도착한 오리엔테이션 장소에는 나이 든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내 짐작과는 달리 앳된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뮤지엄에 갔을 때마다 이런 직책을 맡은 사람들은 다 중년 이상이었기 때문에 왠지 같이 일 할 동료들도 나이가 많을 것 같았다.) 우리는 몇 달 후에 있을 교육을 받고 국가안전시험을 치러야 정식으로 뮤지엄 보안요원이 될 수 있었다.
이번에 뽑힌 동료들은 파릇파릇한 20대가 주를 이루었다. 통성명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가방끈이 길 대로 긴 동료들도 꽤 있었다. 역사와 철학에서 석사를 두 개나 가진 사람도 있었고, 건축학 석사를 공부한 사람도 있었다. 아니 왜 이런 사람들이 뮤지엄 보안요원직을 선택했을까? 면접관들이 일단 벨기에 고학력자를 위주로 먼저 추려낸 것 같다. 고등학교 졸업장도 필요하지 않은 자리에 벨기에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지원할 줄이야... 예상밖의 일이었다. 그 이외에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똘똘해 보이는 앳된 동료들도 꽤 있었다. 모두가 화이트 트래쉬와 거리가 멀어 보이는 제정신 박힌 사람들인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두룩하게 면접만 보아왔을 면접관들이 일을 잘했다. (라고 생각했지만 대 반전은 후에 일어난다.)
처음으로 뮤지엄에 나가 기존에 있던 동료들도 소개받았다. 다들 괜찮은 사람 같아 보였고, 몇몇의 동료들은 쉬는 시간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다독자들이었다. 독특한 점은, 동료들 중에 기본적인 사회생활은 가능하지만 사기업에서는 일을 찾기 어려운 자폐가 있는 동료가 둘이 있었다는 것이다. 한 명은 경증이었고, 다른 한 명은 은퇴를 거의 앞두고 있는 조금 더 자폐증상이 심한 사람이었다.. 사회성이 많이 떨어졌지만, 공격적이거나 충동적이지는 않았다.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할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과 교류하고 친목을 쌓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한국과는 너무 다른 구성에 깜짝 놀랐다. 고학력자, 저학력자, 다독자, 자폐인, 외국인 노동자(=나)라는 다채롭고 이색적인 구성이었다.
일은 어렵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하루종일 벽만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자리에 앉을 수는 있었지만 책을 보거나 다른 짓을 할 수는 없었는데, 뮤지엄에 와서 미술작품에 손을 대는 사람이 많지는 않으니 할 일이 더더욱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고, 폐관시간이 되면 방문객들을 모두 밖으로 내 보낸 뒤 문을 닫고, 일 하는 동안에는 내가 맡은 곳을 돌아보면서 이상이 있는지, 누가 손대는 사람이 있는지를 체크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퇴근 후에도 해가 쨍쨍하게 떠 있는 것을 보고 너무 기뻤다. 출퇴근하는데 3시간씩 버렸던 전 회사에 다니다 집 근처에 있는 직장으로 옮기니 라이프 퀄리티가 몇 단계는 상승하는 느낌이었다. 주말에 프로젝트니 뭐니 기한을 맞추기 위해 예정에도 없는 일을 하는 일도 없었고,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제로였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이 지나니 점점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예술작품 감상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같은 곳에서 일을 하니 거의 모든 설명을 외울 지경이었다. 석사학위가 두 개나 있는 동료에게 왜 이 일을 하냐고 물었다. 그 동료는 스트레스받는 일이 싫어서 마음 편한 일이 하고 싶단다. 이해는 하지만, 이 일은 마음이 편해도 너~~~~ 무 편하다.
이대로 평생 뮤지엄 보안요원만 하다 은퇴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까매진다. 벽만 보고 있다가 은퇴라니... 그러기엔 나는 너무 하고 싶은 것도, 궁금한 것도 많았다.
도저히 이렇게는 안 될 것 같아, 못다 한 공부의 한을 풀 겸, 회사를 다니면서 저녁에 직장 다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브뤼셀 자유대학 미술과학-고고학에 지원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지난번 미끄러진 대학원은 문화경영이었으니, 경영을 빼고 담백하게 문화 미술 관련 과목만 있는 미술과학을 선택한 것이었다.
남편은 이제 안정적인 직장이 있는데 또 무슨 공부냐고 한다. 역시 나랑 안 맞는 정반대의 남의 편이다. 베짱이는 개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 것일까? 한국에서 교육대학원 공부를 하다 남의편을 만나 벨기에로 이민을 오면서 석사공부를 한번 접었고, 호기롭게 앤트워프 대학원 문화경영 공부를 시작했지만 수학과 네덜란드어가 발목을 잡아 다시 미끄러졌다.
인생은 삼세판이다. 세 번째 도전도 못할 것은 없지 않은가. 회사를 다니며 공부를 하며 나의 시간은 잘 흘러갔다. 다행히 예술과학은 내 적성에 잘 맞았고 수학도 필요 없었다. 게다가 한번 미끄러진 대학원의 경험이지만 공부를 하며 네덜란드어도 많이 늘어있던 상태이기에 이번에는 할만했다. 그리고 당장 목구멍에 풀칠을 해야 할 걱정 없이, 직장이 있는 상태에서 하는 공부는 편안했다.
이제 곧 정식 보안요원이 되기 위한 국가안전시험 교육도 시작되었고 모든 게 순탄하게 흘러갔다. 대학원 공부도 흥이 났다. 2학기 중반에 들어섰을 때, 고추장와플 주니어 1호가 생겼다. 결혼한 지 3년 차에 생긴 아기에 우리는 기뻤다. 대학원은 휴학을 하고 아기가 좀 더 크면 다시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제 화이트 트래쉬 없는, 지루하지만 참고 다닐만한 안정적인 직장도 있겠다, 곧 태어날 고추장와플 주니어 1호를 위해 집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벨기에인의 뱃속에는 벽돌이 들어있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벨기에인들도 한국인들처럼 집은 자가를 선호한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봐도 매달 백만 원가량의 월세를 내느니, 자가가 낫지 않겠는가?
10번이 넘게 집을 보러 다닌 끝에, 잠재적인 가능성이 많은 집( 가격이 싸고 쓰러져 가지만 개고생이라도 참고 고치면 살 만하게 될 집) 을 발견했고 남편과 나는 은행 대출을 받아 집을 계약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은 없었다. 그동안 대학원 다니느라 가진돈도 다 썼고, 남편도 월급 받아 내 생활비를 보조해 주느라 우리는 가진 돈이 없었다. 100프로 은행대출, 은행의 노예가 되어 열심히 모기지론을 갚겠다라고 생각하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세상을 다 가졌다. 재미없는 직장이지만 안정적으로 월급 주는 곳이 있고, 지적호기심은 대학원에 다니며 채웠고, 이제 곧 나올 아기가 생겼고, 자가주택을 가진 자가 되었다 (비록 진짜 주인은 은행이긴 하지만).
모든 뮤지엄 보안요원은 국가안전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통과하지 못하면 앤트워프 시청과 맺은 계약은 무효가 되었다. 그래도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직책으로 보는 시험인데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아 걱정이 되진 않았다.
교육은 시작되었고 우리는 1주일간 뮤지엄 대신, 앤트워프시의 행정청으로 출근을 하여 수업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