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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추장와플 Sep 22. 2024

청천벽력 같은 공무원 부적격 판정

지네가 공무원  합격시켜 놓고 부적합하다고?

벨기에 앤트워프시의 가장 말단 공무원 필기와 면접에 합격하여 뮤지엄 보안요원으로 뽑혔다. 이제 계약서에 서명한 대로 공무원 합격의 조건으로 내 건,  국가안전시험에 합격만 하면 모든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말단 공무원이 치는 시험인데 어렵지는 않겠지.


없는 돈에 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을 받아 거의 쓰러져 가지 고치면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집을 샀고,  뱃속의 아기는 무럭무럭 커 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순리대로 진행되는 것 같아 즐거웠다.


국가안전교육이 시작되어 우리는 뮤지엄대신 시청으로 출근을 했다. 수업 첫날이었다. 교육을 맡은 사람은 보안요원의 정의와 자격을 설명했다.


보안요원은 기관의 안전과 보안을 지키기 위해 근무하는 사람을 말하며, 이 직책을 맡기 위해서는 유럽연합에 소속된 국가의 시민권이 있어야 한다.

어라? 잠깐만. 시민권과 영주권은 분명히 차이가 있는데? 나는 영주권이 있지만 시민권은 없는 한국인인데? 머리가 잠시 멍해졌지만, 재빨리 정신줄을 잡고 교육담당자에게 말했다.


"저기요, 잠시만요. 저는 국적이 한국인데요? 유럽연합 소속 국가의 시민권이 없는데요?"

"아니, 2중 국적 아니에요? 벨기에 국적도 있는 거 아니에요?"

"아니요. 저는 한국국적만 있어요. 한국은 법적으로 2중 국적이 불가능해요."

"확실해요? 모로코나 미국 이런 데는 되던데."

"다른 나라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국은 2중 국적 불가능한 국가예요. 그건 확실합니다."


벨기에도 2중 국적을 허용하는 국가였으니, 아마도 당연히 2중 국적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어느 한 지인은 미국인 아버지, 에콰도르 어머니를 두고 있고 벨기에 인과 결혼하여 3중 국적을 가진 사람도 보기는 봤다. 이 사람이 이혼해서 또 다른 다중국적이 허용되는 국가인과 결혼하면 4중 국적이 될 수 도 있다.


아무튼 교육담당자는 급히 밖으로 나가 인사팀으로 전화를 했다. 인사팀 담당자 중의 한 명이 수업을 하던 교실 밖으로 찾아왔다.


"당신의 국적 관련해서 교육담당자에게 설명 들었어요. 국적은 언제 바꿀 거예요? 최대한 빨리 신청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뭐시라? 국적을 바꾸라고? 아니 잘못은 그대들이 했는데 왜 내 국적을 바꿔야 해? 벨기에 인들은 벨기에 국적을 못 가져서 안달 난 중동 이민자들을 수두룩하게 보아왔기 때문에 나도 바로 "오케이. 노 프라블럼."이라 할 줄 알았나 보다.


아주 먼 미래에, 나중에 꼭 필요한 순간이 되었을 때, 국적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내 결정이 아닌 남의 잘못으로 인해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국적을 바꿔야 한다는 시나리오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닌 밤중에 왠 날벼락이란 말인가.


난 당연히 국적을 바꿀 의사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공무원 지원 시에 이력서에 국적을 한국으로 기했고, 필기시험 때 한번, 또다시 면접 때 한번, 국적이 한국이라고 적힌 아이디카드를 제시했다. 내 잘못이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본 직책에 대한 공고에서도 '유럽시민권자일 것'은 써져 있지 않았다. 면접만 수두룩 빽빽하게 봐서 사람 잘 뽑고 일 잘하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인사팀이 새는 바가지였을 줄이야....


"국적을 바꾸지 않으면 부적격이라 임용될 수 없어요. 국적을 바꿔야만 본 직책으로 계속 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면 부득이하게 부적격으로 임용을 취소해야 합니다. "


머릿속이 하얘졌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사서 계약서에 사인도 했고 이제 곧 태어날 고추장와플 주니어 1호도 있는데 임용취소라니... 그렇지만 내 의사와 반해서 국적을 바꾸기는 죽어도 싫었다. 나는 한국인인데 왜 내가 되고 싶지도 않은 벨기에인이 되어야 하는데! 아니 무슨 인간극장 찍는 것도 아니고 왜 내 인생은 이렇게 바람 잘 날이 없단 말인가! 이제 좀 먹고살 만 한가 했는데 또 문제가 생겨버렸다. 이젠 아기의 미래까지 걸려있다.


대출금을 갚지 못해 집안 곳곳에 빨간 압류딱지가 붙는 상상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교육에 다시 참여하지 못했고 앤트워프시 인사과로 계속 불려 다녔다. 어르고 달래기가 시작되었다. 본인들의 잘못을 덮기 위해 이런저런 미끼를 던졌다.


"그러면 다른 부서로 가서 사무직으로 일하는 건 어때요? 그건 보안 관련 업무가 아니라서 지금 가진 국적으로도 가능한데. 게다가 사무직이니까 더 낫지 않아요? 대신 1년 계약직이에요. 5일 안에 계약직이라도 우리가 제시하는 직책을 할 건지 말 건지 결정해 주세요. 안 그러면  어쩔수 없습니다. 부적격으로 해고를 하는 수밖에요."

차마 하지는 못했지만 '이 뭔 개소리야?'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본인들의 잘못이 들통나면 골치 아프니 1년 쓰고 치워버리자 라는 생각인가 보다.

"종신계약으로 임용되었고, 지금 속에 기도 있고요, 얼마 전 집 사서 계약서에 사인도 했어요. 다른 직책을 주신다면 하겠지만 종신계약으로 하지 않으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왜 그냥 국적을 바꾸면 되는 걸 가지고 그렇게 어려운 길을 가냐고 했다. 그렇다. 국적은 바꾸면 되는 거다. 그런데 나는 내 의지에 반해서 국적을 바꾸기는 싫다. 어떤 나라 사람에게는 국적은 그냥 단순히 엿 바꿔 먹는 차원이 아닌 것을 이들도 알아야 한다.


수년 전 벨기에 정부의 총리였던 Yves Leterme이라는 사람에게 한 기자가 벨기에 국가를 불러달라 요청했더니 프랑스 국가를 불렀던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을 정도로 벨기에인은 기본적으로 국가에 대한 애착이 없다. 이들에게 어떤 한 국가에 소속된다는 것은 회사를 바꾸는 것처럼, 쉽게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의 벨기에의 전 총리 Yves Leterme


나는 한국인으로 태어나 한국에서 교육을 받고, 한국인 부모님을 둔 그냥 한국인이다. 차후에라도 벨기에로 귀화를 하게 되는 일이 있을지라도, 내 의지로, 내가 결정해서 된다면 상관없었지만 지들 잘못을 덮기 위해 나보고 강제로 귀화신청을 하라니... 나는 한국국적도, 이미 계약서에 사인한 내 집도, 시험을 통과해서 얻은 내 공무원자리도, 그 어느 것 하나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나는 인사팀의 잘못을 까발리고 참 교육을 시전 하기로 결심했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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