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인생이 꽤 젊은 나이에 스러지는 것을 지척에서 본다는 건 일반적인 경험이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이야기가 관심을 받고 그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궁금해하고 안타까워하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남편의 눈에서 안광이 사라져 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본 나는 남편의 죽음 이후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다소 회의적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그려왔던 미래에 당도하지 못하고, 노력했던 삶을 보상받지도 못한 상태로 병사에 이른 남편을 본 나는 '삶이라는 것은 참 허망하구나.'라는 생각을 떨치질 못했다.
또 다른 한편으론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이 아주 비극적으로 다가올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인생을 마무리할 시간이 주어진 다는 것이다. '그러한 시간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불편하지만 눈감을 수 없는 진실을 마주해 보면 시한부 인생 은 곧 '나에게 내 인생을 마무리할 시간이 주어졌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나는 남편의 죽음 이후 나 역시 불가항력의 이유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의 내 아이들을 생각한다. 내가 없으면 고아가 되어버리는 나의 아이들. 양쪽 할머님할아버님들이 다 살아 계시지만 부모의 자리는 단순히 보호자의 자리로 대체되지 않는다.
나는 죽음을 생각보다 우리의 가까이에 있고 언제든지 닥칠 수 있는 천재지변의 느낌으로 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너무 무겁지 않게, 재난재해에 관련된 일에 대해 당부하듯이 말한다. "혹시 엄마가 아빠처럼 일이 생겨 하늘에 가더라도 너희는 너희의 인생을 살아야 해. 지금처럼 웃기도 하고 일상을 살아가듯이 말이야. 엄마는 너희가 엄마가 없다고 울고 무너지고 힘들어하는걸 절대 바라지 않아. 절대, 절대로! 꼭 웃으면서 씩씩하게~ 지금처럼 지내야 해. 아빠가 보이지 않아도 우리 옆을 지켜주는 것처럼 엄마도 너희 곁에서 지켜줄 거야." 그럼 아이들은 "네~그렇게 할게요"라고 별 일 아닌 듯이 대답한다.
스스로도 아이들에게 잔인한 말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사실을 불쾌하게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부모도 본인이 죽었다고 자식들이 식음을 전폐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폐인 같은 상태로 애도와 슬픔에 잠겨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나는 이런 상태로 늘 죽음을 대비한다.
나는 아이들과 무척 유대관계가 좋고 특히 아이들은 지나칠 정도로 내게 애정표현을 하고 또 받기를 원한다. 사실은 이 상황이 더 염려스럽다. 아이들과의 감정적인 교류가 깊고 온전할수록 아이들이 받아야 할 충격의 깊이가 더 깊을까 봐. 아무것도 못하고 울기만 할까 봐. 지금같이 옆에서 지켜주면서 괜찮아 다 지나갈 거야라고 말해줄 어른이 없을까 봐. 있다고 해도 아이들이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너질까 봐.
며칠 전 건강이 악화되어 41킬로까지 빠지고 신체에 이상증상이 나타났을 때 덜컥 겁이 났다. 갈비뼈가 다 튀어나와 만져지고 빈혈증세에 어지러워 숨이 쉬어지질 않자 '안되는데 내가 아프면 안 되는데, 우리 애들 나 없으면 안 되는데' 생각부터 났다.
"엄마 너무 답답한데 우리 나갈까? 차갑고 단거 먹으면 정신 차릴 수 있을 거 같아 뭐 먹지? 아 설빙 갈까?"라고 하자 라온이가 "그거 비싸잖아요.."라고 말을 흐린다. "근데 엄마 너무 답답해서 뭐 좀 먹어야 할 거 같아" 했더니 라온이가 제 용돈으로 사주겠다며 용돈을 가지러 방으로 들어갔다.
도착해서도 멍하니 정신이 팔려있어 아이 둘이 가서 현금으로 주문을 하곤 조금 있다 지온이가 500원짜리 과자 하나를 더 사가지고 왔다.
"엄마 이거 드세요"
"응? 이게 뭐야? 따로 산 거야?"
"네. 엄마 드시라고요"
"에구 안 사 와도 되는데"
기다란 과자라서 셋이서 사이좋게 한입씩 나눠먹었다. 한입씩 더 남았길래 아이들 입에 골고루 한번씩 더 넣어주었다. 주문한 빙수가 나오자 아이들이 찾으러 다녀왔다. 빙수를 앞에 두고도 생각하는데 정신이 팔려 먹지 못하고 있으니 입으로 빙수가 한입 쑤욱 들어왔다.
"엄마 정신 차려. 살쪄야지 이게 뭐야. 너무 살 빠져서 안돼. 이거 먹고 살쪄"
지온이의 잔소리를 위안삼아 한입 오물오물 씹고 있으니 다시 차가운 빙수 한입이 쑤욱 들어온다
"맞아. 엄마 살쪄야 해. 빨리 먹어"
이번엔 라온이가 입에 넣어준다. 수저도 들지 않고 아이들이 먹여준 빙수를 오물오물 씹으며 다짐했다.
'그래.. 정신 차려야지'
내 상태를 며칠간 보던 라온이가 씻고 있던 내 등뒤로 말을 건다.
"엄마 검사 좀 받아봐요. 엄마도 암 아니에요? 걱정되니까 가서 검사받아요"
"이 바보야. 엄마가 암이면 엄마는 죽어"
"아 지온이가 아빠 때문에 암이면 다 죽는다고 생각하는구나. 암이라고 다 죽는 건 아니야. 아빠는 워낙 위험한 병에 걸려서 처음부터 생존율이 높지 않았던 케이스였던 거지. 전 세계에서 아빠가 걸렸던 병이 완치된 사람이 없다고 하거든. 그런 병 아니면 초기에 발견하고 수술 잘하면 암도 살수있어"
나는 꼭 수명을 다하고 아이들 곁을 떠나야지. 먼저 가서 아이들 입에서 서럽다는 말 나오지 않게 해야지. 내가 염려했던 상황이 도래해 아이들이 나의 당부대로 살아가는 날이 없기를, 오늘도 가늘고 길게 살자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