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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요 Jul 05. 2024

남편이 있었으면 이 정도 일은 금방 해결했을 텐데

아빠가 부재해도 아이들은 성장해 나갑니다.

쌕쌕거리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깊은 잠이 내려앉은 새벽 세시반, 이이익 가스가 새는 소리인지 이익 좁은 틈새로 물이 새는 소리인지 모를 정체불명의 소리에 잠이 깨어졌다.


눈을 비빌 틈새도 없이 잠에 취해 비틀비틀 소리의 근원지인 화장실로 가보니 맙소사. 비데의 필터 부분에서 물이 새는 것이 아닌가. 새벽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어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무릎을 굽혀 상황을 직시해보기로 했다. 잠이 깰 정도의 요란한 소리와 동시에 상당히 많은 양의 물줄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아 이걸 어쩐다'


자 침착하게 생각을 해보자. '변기 쪽의 비데 필터에서 물이 새니까 변기 쪽 밸브를 잠그면 해결이 되겠다' 생각을 마치자마자 바로 실행에 옮겼다. 어느 쪽으로 돌려야 잠기는지를 몰라 이쪽저쪽 한참을 돌리는데 물이 잠겨지는 시늉조차 없었다. 당황한 채로 머뭇거리기엔 그 사이에도 철철 새고 있을 물세가 아까워 재빨리 차선책으로 넘어가야 했다.


잠옷바람으로 종종종 현관 밖으로 나가 집 전체 수도를 잠가보기로 한다. 작년 남편이 살아있을 당시 아래층에 물이 샐 때 인부분들이 작업하느라 마지막으로 열어봤던 수도관의 문을 열었다. 동파방지 때문에 넣어둔 하얀 솜이 각종 먼지에 거뭇하게 변해 만지는 족족 손이 찝찝했지만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서둘러 회색 솜을 빼내어 밸브를 확인하고 돌렸다. 이번에도 어느 쪽으로 돌려야 하는지를 몰라 이쪽저쪽 돌려보았다. 물이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을 해 줄 사람이 없는지라 혼자 돌려보고 집으로 다시 들어와 화장실로 가서 확인하고 다시 나와 밸브를 돌려보고를 여러 차례 하는데도 물줄기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분명 밸브를 끝까지 잠가 돌아가지 않는 것 같은데도 들어가서 확인하면 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쉬운 일도 쩔쩔매고 있는 나 자신이 무척 한심하고 바보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자기 비하와는 별개로 어쨌건 상황을 빨리 수습해야 하므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주섬주섬 옷을 갖춰 입는 도중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쳐갔다.


'남편이 있었으면 이 정도 일 쯤은 걱정 없이 금방 해결했을 텐데'

'그이가 손재주가 좋아 집안 구석구석 여기저기 안 고쳐놓은 곳이 없었지'

'이 시간에 도움을 요청하러 애기엄마  혼자 나가면 왜 남편이 도와주질 않는지 궁금해하지 않을까?'

'남편 없이 애들이랑 셋이 자고 있었다고 하면 경비아저씨가 이상하게 생각할까?'


바지를 입는 내내 생각이 확장되어 뭉게뭉게 퍼져갔다. 그러다 '남편이 없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가 쿵 하고 실체화되어 턱 하고 고민으로 떨어졌다.


'혹시라도 경비아저씨가 여쭈어 보시면 "남편은 해외에 나가서 일하느라 집에 없어서요"라고 대답하자'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입을 꾹 다물고 나가기 위한 채비를 다 마쳤다. 도움을 요청하러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보자는 생각으로 수도관으로 갔다. 왼쪽으로 끝까지 돌리니 잠겨지는 느낌이 났다. 한 번 더 집으로 들어와 물이 잠겼는지 확인했다. 세찬 물줄기가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로 변해있었다.  


'다행이다..'


상황을 수습했단 안도감보다 경비아저씨에게 남편이 없는 상황을 꾸며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이미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의 상황과 시나리오가 폭풍처럼 거쳐간 뒤였다.


방으로 돌아와 다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침대에는 딸이, 바닥에는 아들이 이불을 펴고 누워있었다. 침대에 올라가 자고 있는 딸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선풍기 바람에 살짝 차가워진 아이의 살결이 보드랍고 시원했다. 세상 어떤 것도 이보다 시원하고 기분 좋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아 한참을 쓰다듬고 껴안고를 반복하다 아이의 볼에 뽀뽀를 했다. 지온이가 나의 인기척을 느끼곤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제는 나보다 발사이즈가 커지고 키 차이도 얼마 나지 않지만 여전히 아기 같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잠에 들었다.


우리 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사람은 아들이다. 라온이는 우리 셋 중 제일 먼저 일어나 냉장고부터 확인한다. 내가 아침을 차려주지 않는 날이 훨씬 많기 때문에 일어나면 혼자 뒤적거리며 먹을 것을 찾아낸다. 아이가 냉장고를 여는 소리에 잠이 깨 "라온아 식탁 위에 바나나 먹어"라고 말했더니 "계란 삶아 놓은 거 먹을게요"라고 대답한다.


"라온아 지금 물이 안 나와. 새벽에 물이 새서 수도를 잠가놨어"

"네...? 그럼 어떻게 씻어요?"

"너 씻을 때만 엄마가 물을 틀어줄게"

"그럼 지금 틀어주세요. 손이 찝찝해요"


눈만 간신히 뜬 채로 걸어 나와 현관밖으로 나갔다. 라온이가 복도로 따라 나와 수도밸브를 어떻게 푸는지를 유심히 지켜봤다.


"라온아 물 틀었거든? 들어가서 안방 화장실 확인해 봐. 거기 물 샐 거야"

"어? 진짜 새네.."

"다 쓰면 물 잠가야 하니까 다시 말해줘"


2분 뒤, 물을 잠가달라 이야기해 밸브를 잠갔다. 그리고 나는 침대로 다시 들어와 누웠다. 등교하기 전 아이가 물을 다시 써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바로 달려 나가지 않고 가만히 침대에 있었더니 라온이가 혼자 밸브를 풀고 물을 다 쓴 다음에 잠가놨다. 늦게 일어난 누나에게 "누나 지금 물이 새서 물 쓸 때는 밸브를 풀고 다 쓰면 잠가야 해" 라며 이런저런 상황을 설명하곤 먼저 학교로 출발했다. '저 녀석이 언제 저렇게 컸지..'생각이 들었다.


늦장을 부리는데 일가견이 있는 딸이 오늘도 설렁설렁 준비를 한다. 삶은 계란을 먹다 목이 막혔는지 "엄마 물이 안 나오면 물 못 먹어요?"하고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묻는다. "물 잠겨 있어도 정수기 내에 물이 있어서 네가 먹을 만큼은 나올 거야" 했더니 그제야 안심이 된 얼굴로 물을 따라먹는다. 딸아이가 준비를 다 할 동안 나는 여전히 침대에서 뭉기적 거리고 있었다.


등교준비가 다 된 지온이가 "물 잠겨있으니까 엄마 드실 만큼 정수기에서 따라 냉장고에 넣어놨어요. 그거 꺼내서 드세요"라고 말한다."응. 고마워~사랑해. 오늘도 잘 다녀와" 인사를 하고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물병에 딸아이가 막 떠놓은 물이 반통 담겨있었다.


언제 이만큼 컸지..

이 녀석들 언제 이만큼이나 컸지.

아이들이 하나둘씩 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갈 때마다 엄마의 손길이 갈수록 덜 필요한 것 같아 아쉽다가도 그만큼 컸구나 싶어 기특하다. 나는 너희가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회의 일원으로 자라주는 것만으로도 대견하다. 고마운 마음 가득 안고 아침을 시작했다.




        

        

ps. 수리하시는 분이 오셨다 가셨는데 변기 밸브가 고장 나 잠겨지지 않는 게 맞았다고 하시더군요. 비데는 분리해서 따로 떼어놓고 일반 커버로 다시 교체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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