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그냥 하루를 살아가며 온도가 높아지고 해가 길어지는 계절의 오고 감만 느끼느라 달력을 잘 안 봤는데 그새 3개월이나 지났어. 산 사람의 시간은 이리도 빨리 흐르는데 죽은 사람의 시간은 어찌 흐르는지 모르겠네. 어떻게 지내고 있어? 땅에서 하늘을 올려다봐도 당신이 잘 안 보여서 어떻게 지내는지 당최 감을 잡질 못하겠단 말이야.
나는 잘 보여?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나랑 아이들은 잘 보일까? 난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해. 나와 아이들이 생각보다 너무 잘 지내서 당신이 너무 섭섭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당신이 호스피스에서 두 번째 발작을 일으켜 생사를 오고 간 날,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족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눈은 새빨갛고 얼굴은 웃고 있는 기괴한 얼굴의 우리 셋과 카메라도 쳐다보지 못하고 허공을 쳐다보던 당신을 사진에 담았었던 그날 말이야. 집에 오던 길에 라온이가 "전 아빠가 돌아가셔도 해외에서 일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라고 다짐하듯이 말하더라고.
강형욱훈련사가 인간보다 짧은 수명인 반려견의 죽음을 수차례 경험할텐데 그럴 때마다 어떻게 견디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을 했어. "저는 펫로스 증후군(반려견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을 극복하지 않고 유예합니다. 몇 번 슬퍼하고 끝낼 사이가 아니기 때문이죠" 그땐그게 가능한 일일까?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나와 아이들이 딱 그런 상태인 것 같아. 어머님도 같은 맥락의 말을 하셨었어. 나는 얘가 지방에서 일한다고 생각하신다고. 그래서 그런 거니까 당신 없어도 우리 웃고 잘 지내 보인다고 너무 서운해하진 마. 알았지?
지온이가 교내 공모전에 스스로 참가해서 금상을 탔어. 보건 관련 그림 그리는 공모전이었는데 혼자 끄적끄적 뭘 그리더니 제출한다 하길래 그런가 보다 했는데 금상을 탔데. 라온이는 같은 반 여자친구들이랑 동영상 만든다고 한참 주말에 열심이더니 결과물을 교내공모전에 제출해서 5학년에서 1등을 했어. 둘 다 같은 날에 상을 받는다며 나한테 말해주더라. 정작 엄마인 나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것 같은데 스스로 공모전에 척척 입상하는 우리 아이들이 너무 기특하고 고맙더라고.
팔 벌려 둘을 동시에 쳐다보니 왼쪽에는 지온이, 오른쪽에는 라온이가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었어. "얘들아 너무 축하해"라며 와락 안아주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엄마 몫의 축하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는데, 아빠 몫의 축하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하단 생각. 내가 아무리 기쁘게 축하를 해줘도 반쪽짜리 축하만 하는 것 같아서 애들한테 너무 미안했어. '아빠 몫의 축하가 분명 있을 텐데.. 아이들이 부족하다 느끼진 않을까'
아이들한테 잔뜩 축하해 주고 돌아서자마자 눈물이 쏟아지더라고. 당신의 부재는 이렇게 한 번씩 고요 속의 폭풍처럼 몰려와. 소용돌이가 한차례 마음을 어지럽히고 쓰러트리면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가만히 마음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고 있어.
아까 지온이 키를 재보았는데 152cm더라. 초등학교 2학년때 했던 성장판 검사에서 최종 키가 150 이란말에 좌절했던 기억나지? 더도 말고 엄마인 나만큼(159)이라도 커라 빌면서 성장판 지연주사를 맞으러 다녔었는데 벽처럼 느껴지던 그 150이라는 숫자를 넘었어. 정말 감개무량하더라고. 우리 지온이 진짜 150에서 멈추는 줄 알고 걱정 많이 했잖아. 요새 지온이 키도 부쩍 크고 체형이랑 얼굴이 나랑 너무 비슷해서 그런지 자매소리를 많이 들어. 진짜 날이 갈수록 더 닮아가는 거 같아. 저번에 길 가다 거울에 나란히 비친 모습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니까 ㅋㅋ
아 맞다. 지온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짝사랑남한테 고백을 했거든? 상대방 남자애가 자기는 이런 거 처음 받아봐서 나중에 헤어지면 어색할까 봐 고백을 받아줄 수 없다고 했데. 이게 말이야 방귀야.. 이렇게 예쁘고 소중한 내 딸의 첫 고백이 까이다니, 그 녀석 참 보는 눈도 없나 봐! 아 당신은 남자애가 안 받아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려나.
이제 좀 있으면 지온이 2차 성징이 올 거 같아. 원래 딸의 첫 월경에는 아빠가 축하의 의미로 꽃다발을 사주는 거라는데 지온이 첫 월경에는 내가 직접 꽃 시장에 가서 꽃을 골라 만들어 축하해주려고 해. 내가 더 호들갑 떨고 유난 떨면서 축하해 줄게. 우리 애들이 반쪽짜리 축하라고 느끼지 못하게 혼을 쏙 빼놔야지.
여보 있잖아. 나는 열심히 살고 싶지가 않아. 치열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 지금 내 상황이 앞뒤 안 보고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건 맞는데, 나는 그렇게 살기가 싫어. 돈을 적게 벌어도 스트레스 안 받는 일 하고 싶고 주말에는 아이들이랑 셋이 배드민턴 치러 다니고 싶고 밥 먹고 난 저녁에는 아이들이랑 시장 한 바퀴 돌고 오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 지금처럼 셋이 손 꼭 잡고 장 보러 다니고 물건도 나눠 들면서 집에 오는 길에 떡볶이 한 그릇 나눠먹는 그런 하루를 살 거야.
나는 당신처럼 미래를 보면서 살지 않을래. 당장 오늘만 보고 오늘만 웃으면서 살 거야. 그리고 그런 날이 쌓여 내 인생이 되겠지. 나는 그런 내 인생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될 거야. 좀 대책 없고 한심스러울 순 있겠지만 훗날 이 시간이 아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추억이 될 거라고 믿어.
내가 열심히 살진 못해도 열심히 애정을 쏟아부어줄 자신은 있거든.
오늘도 침대에 누워 아이들이랑 꺄르륵 한참을 웃었어. 이런 게 행복이잖아 그렇지? 그런 거로 따지면 나 지금 행복한 거 맞지? 당신도 그곳에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외로우면 좋은 사람도 만나. 옆에 있는 사람 좀 소중히 대해주고. 자고로 멀리 있는 사람보다 지금 내 곁을 지키는 사람이 최고야. 나는 당신 옆에 있을 수가 없으니까 곁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얼마든지 만나도 돼. 그게 내 진심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