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03
그 애가 떠올랐다. 맑은 피부 위로 선한 웃음을 띄우던 그 아이가. 우연히 그 아이를 닮은 유튜버의 브이로그를 보게 되었다. 시간 낭비 같아 항상 브이로그를 보지 말아야지 생각하지만 내 손은 브이로그를 끊을 생각이 없나 보다. 새로운 브이로그를 찾아 헤매던 중 그 아이를 닮은 사람의 섬네일을 발견했다. 그 아이보다 날카로운 인상이었지만 하얀 피부에 웃을 때 시원하게 찢어지는 입매가 닮아서 그 영상을 눌러보았다. 영상 속 여성은 30대 초반쯤 되어 보였다. 영상에는 전업 유튜버로서 이런저런 행사에도 참여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책도 읽고, 반려 동물과 놀아주는 등 평온하고 알차게 사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영상을 보며 그 아이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 아이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학창 시절 내내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나의 시선에 항상 걸리는 아이였다. 맑은 얼굴과는 달리 깊고 깊은 속을 가진 듯한 그 아이.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그 아이는 언제나 책을 끼고 있었다. 그땐 그 모습이 멋있어 보이면서도 당장 입시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 책을 왜 저렇게 열심히 읽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 이해가 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는데, 바로 그 애의 주변에 친구들이 많았던 것이다. 소수의 친구들과 깊이 있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쓰던 나에게는 그 아이가 참 신비스러운 존재로 보였다. 항상 책을 읽지만 친구는 많은, 바보 같고 순수해 보이지만 속에는 심연을 품고 있어 말할 수 없는 아우라를 내뿜는 그 아이를 남몰래 부러워했다.
그 아이와 잠깐 가까워진 적이 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에서는 상위권 학생들을 위한 자습실이 있었다. 어느 날, 그 아이와 같은 자습실 옆자리에 배정을 받았다. 같은 반이었음에도 서먹한 관계였던 우리는 그때를 기점으로 조금씩 가까워졌다. 둘만 아는 농담을 나누고, 문예부였던 그 아이에게 책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친구 관계에 대한 어려움도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다. 동경하던 아이와 친해지는 것은 신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관계는 거의 자습실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만 유효한 것이었다. 자습실을 나오면 서로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며 예의 그 서먹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마저도 그 아이의 성적이 떨어져 자습실을 나가게 되며 더 이어지지 못했다.
대학교에 입학한 후로 형식적인 생일 축하 연락이 몇 번 오가다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 인생에서 스쳐 지나간 관계였음에도 그 아이는 나의 정신에 또렷한 흔적을 남겼다. 원하는 대학교에 입학하여 화려하고 대책 없는 신입생 시절을 보낸 후 나는 갑자기 책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나는 ‘갑자기’가 아니었음을 안다. 그것은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그 아이를 닮고 싶은 마음이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적당한 타이밍에 발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동경이 얼마나 큰 위력을 가진 감정인지 나는 안다. 그 애를 따라 정신없이 책을 읽다 보니 글이 쓰고 싶어 졌고, 글을 쓰다 보니 읽고 쓰는 존재가 아닌 나를 상상하기 어려워졌다.
나는 대체로 지금의 내 모습에 만족한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에는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그 아이를 그저 모방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럴 때면 나 자신이 부정당하는 것 같아 서글프고 괴로워진다. 그 아이라는 이상이 내 안에서 지워지고 그 이상으로 향하는 관성만 남았으면 좋겠다. 어디를 향하는지 모르는 채 가다 보니 어느새 그 아이가 되어 있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