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냐 Oct 09. 2024

읽고 쓰는 할머니가 될 거야!

2024.10.05

  오랜만에 애인과 카페에서 오랫동안 수다를 떨었다. 알코올보다 카페인이 대화에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관계가 있다. 알코올은 의식을 느슨하게 풀어주어 비교적 어색하고 불편한 대화 상황에서 윤활유 역할을 한다면, 후자는 가까운 관계에서 맑은 정신으로 더 많은 말을 쏟아내도록 만드는 각성제의 역할을 한다. 나와 애인은 대화할 때 카페인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커피를 마시며 대화하는 그 순간만큼은 평소의 지적 수준을 초월하여 온갖 주제를 자유롭게 누비는 교양 있는 어른이 된 것만 같다.     




  우리가 찾아간 카페는 인천의 어느 오래된 동네 한가운데에 있었다. 짙은 우드톤의 인테리어와 공간을 가득 메운 찐한 재즈가 인상적인 이 카페는 그 동네와 참 안 어울렸다. 우리는 둘 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세련된 공간에 들어가면서도 촌스러움 속에 둘러싸여 있다는 데서 마음의 안정을 느껴서였을 것이다. 우린 커피를 주문하고 늘 그랬듯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외투를 벗으며 비로소 가을이 온 것을 실감했다. 우리는 이번 여름이 얼마나 더웠는지 가을이 얼마나 기다려졌는지 이야기하다, 우리의 기념일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다, 사고 싶은 가을 옷에 대해 이야기하다, 내년 가을에 가고 싶은 재즈 페스티벌에 대해 이야기하다, 가을 하면 생각나는 음악과 영화와 책에 대해 이야기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는 선선한 가을 이야기와 환상의 조화를 이루었다.     


  한창 신나서 이야기하던 중 책에 대한 주제가 나오니 갑자기 침울해졌다. 나의 글은 언제 책이 될까 막막해졌기 때문이다.    

  

“근데 내 글은 언제 책이 될까?”     


“10년 안으로 되지 않을까?”   

  

“10년? 너무 길어. 나는 빨리 출판하고 싶어.”   

  

“왜?”     


“빨리 정식 작가가 되고 싶으니까.”     


  내가 말하고도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아마 커피가 두뇌를 각성시켜 준 덕분이리라. 빨리 출판하고 싶은 것과 빨리 정식 작가가 되고 싶은 것은 동어반복이다. 그럼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욕구의 기저에는 어떤 생각이 깔려 있을까? 애인은 나를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목표 지향적이고 승부욕 강한 나와는 달리 애인은 느긋하고 여유로운 성격을 지니고 있다. 나는 누군가 애인에 대해 물어보면 영화 <엘리멘탈>의 캐릭터 웨이드를 꼭 닮았다고 소개한다(웨이드는 물을 캐릭터화한 인물이다. 궁금하면 영화를 찾아보시길). 우리는 서로를 가장 잘 알지만 아마 죽을 때까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영화 속에서 엠버가 자신의 자아를 찾는 것을 도와준 웨이드처럼, 애인은 나도 몰랐던 나의 모습을 직면하는 것을 도와준다.      


“왜 브런치 작가로서 글을 쓰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거야? 직장 다니면서 글을 쓰는 것만으로 이미 대단한 것 같은데.” (애인은 나를 다루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이렇게 적당히 띄워줘야 마음이 열린다. 이런 전략적인 사람 같으니...)     


  곰곰이 생각하다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나는 성취감이 필요한 것 같아. 성취감 없이 매일 비슷한 일상을 사는 게 무료해.”    

 

그러고는 한참 동안 독백을 했다. 내가 기대하는 성취감은 단기간에 이루기 힘든 일을 겨우 이뤄냈을 때 느끼는 자극적이고 단기적인 쾌감으로 나는 그저 도파민을 추구했던 것 같으며, 일상 속의 작고 소소한 성취는 무시했었다는 내용이었다. 애인의 관심 어린 눈빛과 카페인이 머릿속에 엉킨 생각을 명쾌하게 풀어내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갑자기 앞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가 번쩍하고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즉시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나는 읽고 쓰는 할머니가 될 거야!”     


  즉 ‘노인이 될 때까지 읽고 쓰는 일을 멈추지 않음’이라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는 뜻이다. 이는 지금까지 추구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목표였다. 도달 지점이 아닌 과정의 연쇄가 그 자체로 목표가 되는 것이다. 이 목표는 책 출간보다 더 쉬울 수도 더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책 출간이라는 목표보다 더 건강한 목표라는 점이다. 도달 지점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지지 않으며, 쉽게 지쳐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전보다 더 근사한 목표를 갖게 되니 괜스레 흡족해졌다.     




  나는 한층 밝아진 얼굴로 애인에게 물어보았다.     


“너는 목표가 뭐야?”     


애인은 대답했다.     


“나는 너랑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 꾸리는 거.”     


음. 더욱 흡족해졌다.


이전 01화 학창시절 그 아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