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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냐 Oct 23. 2024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2024.10.18

  지긋지긋한 무더위가 끝나고 날씨가 선선해지면 나의 초조함은 시작된다. 가을은 두려운 계절이다. 공무원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오늘 밤에 부는 바람은 유독 춥고 건조하다. 가을바람이 품은 한기에 영혼마저 부르르 떨린다.     




  J와 만난 지는 올해로 6년째다. 대학생 때부터 우리는 유명한 껌딱지 커플이었다. 같이 수업 듣고 같이 밥 먹고 같이 공부하고 같이 놀고. 둘 다 타지에서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우린 서로에게 가족이 되어줄 수밖에 없었다. J와 나는 공무원 시험 준비도 함께했다. 같이 독서실을 끊어 옆자리에서 공부하고, 서로의 공부 진도를 점검해 주고, 집중이 안 될 땐 같이 카페에 가서 달달한 디저트를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J와 함께 공부하던 시간 동안 내 세상엔 J밖에 없었다. 함께 J의 본가가 있는 지역으로 시험을 치기로 해서 연고가 아예 없는 J네 지역에서 자취를 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은 엄청난 사랑꾼이라며 신기해했다. 지금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이 대범한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당시의 나는 J와 계속 만나기 위해선 너무 당연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서 한 치의 고민 없이 이사를 했다.   

  

  2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J는 시험에 합격했다. 나는 순수하게 축하해 주었다. J가 그동안 얼마나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는지 다 아니까. 똑똑한 데다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하는 그 애가 합격하지 않으면 합격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리고 그로부터 2년째 나는 여전히 공부 중이다. J가 함께 공부할 때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스트레스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급한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J와 함께 붙어있는 시간이 행복했었다. J가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홀로 공부를 하게 되었을 때부터 나의 지옥은 시작되었다. J는 사회라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며 더 매력적인 사람이 되었는데, 나의 자리는 독서실 책상 한 칸으로 변함이 없었다. J에게 미안하지만 그 애가 직장 생활의 어려움을 털어놓을 때 나는 맞장구를 치고 위로하며 속으로 월세를 걱정했다. 망친 모의고사 성적을 생각했다. 오래 앉아 있어 하루 종일 지속되는 허리 통증을 걱정했다. 그럼에도 J는 암담한 내 세상에 한 줄기 빛 같은 존재였다. J와의 결혼이 내가 공부하는 유일한 동기였기 때문에.     


  J와 관계는 J의 합격 직후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내 안정된 상태를 찾아갔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데이트하며 체력을 아꼈다. 연락의 빈도를 줄여 공부에 더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데이트하는 날을 정해 규칙적인 생활 패턴을 유지했다. 나의 상황에 맞춰주려고 노력하는 J에게 고맙고도 미안했다. 한 달 전쯤 J가 전화로 모의고사 성적을 물어왔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나의 처참한 점수를 말했다. 내가 무너지면 J도 우리 관계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J는 성적을 듣고 충격을 받았는지 잠깐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나한테 자신의 불안함을 막 토로하기 시작했다. ‘내가 너를 어떻게 기다렸는데...’, ‘지금 와서 이러면...’, ‘지금까지 공부를 어떻게 한 건지 이해가...’ 식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들이었다. 내 잘못이 맞으니까, J의 답답함이 이해가 되니까 나는 방어 없이 J가 쏜 말의 화살을 그대로 다 맞았다. 한참을 씩씩대더니 J는 그래도 시간이 충분히 남았으니 자기가 알려주는 대로만 공부하라면서 꽤나 설득력 있게 공부 방법을 제시했다. 그 말을 듣고 비참한 마음속에 한 줄기 희망이 자라났다.  

   

  나는 쉬는 시간, 자는 시간을 줄이며 J가 알려준 방법대로 우직하게 공부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친 모의고사에서 쥐꼬리만큼 오른 성적을 받았다. J에게 말할까 고민하다 더 걱정만 시킬 것 같아서 그냥 알아서 공부하던 차에 J가 또 모의고사 성적을 물어봤다. 솔직한 대답을 들은 J의 표정은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 애는 특유의 화살촉 같은 차갑고 날카로운 말투로 내 성적의 심각성을 설파했다. 하지만 나에게 그 말은 들리지 않았다. 한심하다는 듯한 J의 표정이 내 머릿속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J는 이제 너를 믿을 수 없겠다며 내 모의고사 시험지를 살펴보고 나의 부족한 부분을 조목조목 분석했다. 그러고는 자기가 매일 공부한 내용을 시험 봐주겠다고 했다. 나는 J와 함께 공부하다 관계가 여기서 더 틀어질까 걱정되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어 그렇게 하자고 말했다. J에게 짐만 지워주는 것 같아 마음이 한층 무겁고 조급해졌다. 이상하다, 다른 사람에게 짐을 지워주면 나의 짐이 더 무거워진다. 나는 납덩이같은 마음을 안고 독서실로 향했다.

    

  나는 J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며칠 동안 이를 악물고 암기했다. 이번에 J를 실망시키면 관계가 영영 끝나버릴 것 같았다. 그럴수록 외운 내용은 머릿속을 빠져나갔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식으로 공부를 했다. ‘물을 한꺼번에 미친 듯이 많이 부으면 언젠간 물이 차겠지’라는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나의 주특기인 우직함을 발휘하여 며칠 동안 밤낮으로 암기를 해댔다.    



  

  내일은 J와 함께 공부하기로 한 첫날이다. 내 머리속엔 불완전한 지식이 금방이라도 떠나 버릴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솔직히 J를 실망시키지 않을 자신이 없다. 이별이 다가오고 있다. 왜 나는 안 되는 걸까. 우직함만으론 생계와 소중한 관계를 지켜나갈 수 없는 걸까. 오늘 밤은 유독 춥고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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