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7
나는 본가에 갈 때마다 펜션으로 휴가를 떠나는 느낌이 든다. 본가에 갈 땐 여행을 가는 것마냥 배낭에 이것저것 챙겨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처음에는 아빠가 어이없다는 투로 집에 와서 고작 2박 3일 있는데(심지어 본가는 차로 20분 거리이다) 뭘 그렇게 바리바리 싸왔냐고 물어봤다. 심지어 집에와선 동생의 옷을 입는데 말이다! 배낭엔 옷가지도 없고 세면도구도 없다. 충전기도, 화장품도, 잠옷도 없다.
그럼 배낭 속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느냐 하면, 일단 책이 2권 이상 들어있다. 현재 읽고 있는 책과 만약 그 책을 다 읽으면 읽을 또 다른 책. 약속이 있어 지하철을 타고 이동해야 할 일이 있다면 이북 리더기도 꼭 챙긴다. 이에 더해 노트북도 반드시 챙겨야 하는 품목이다. 노트북은 글을 쓰거나 넷플릭스를 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본가에도 동생의 노트북이 있지만 여기엔 평소 내가 쓰고 있던 글이 저장되어 있지 않아 글을 새로 써야 하며, 넷플릭스 아이디가 저장되어 있지 않아 불편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노트북이 필요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노트북 사용시간이 겹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동생이 노트북을 사용할 때 나는 노트북을 사용할 수 없다. 집에 있는 데스크탑도 오롯이 아빠의 차지이니 PC방에 가지 않고는 컴퓨터를 사용할 수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이 얼마나 처량한 처지인가...) 노트북을 챙기면 자연스럽게 무선 마우스와 마우스패드, 그리고 노트북 충전기도 챙겨야 한다. 아직 끝이 아니다! A4사이즈의 노트도 왠만하면 챙긴다. 이 노트는 다용도 노트이다. 일기장, 필사노트, 영화감상 및 독서감상 노트, 스크랩북의 용도를 모두 담고 있는 노트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 불태워 없애버려야 하기 때문에 절대 이 노트는 온라인으로 대체될 수 없다. 그래서 노트북만 챙길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해명해 본다.
여기에 평소 외출할 때마다 챙기는 파우치(립밤, 민트사탕, 인공눈물, 치실 등이 들어있다), 무선 이어폰, 지갑 같은 것들을과 외출용 가방 및 향수까지 챙기면 완성이다. 이러니 본가에 한번 가려면 여행을 가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항상 챙긴 것을 모두 사용하는가는 미지수이다. 가족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길어 독서할 시간이 없을 수도 있고, 글을 쓰거나 영화 보기가 귀찮아서 노트북을 아예 꺼내지 않을 수도 있다. A4노트는 주말 내내 가방 속에서 빛을 보지 못할 때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함 없이 편안하고 즐거운 주말을 위해 이 모든 것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오늘 이 물건들의 소중함을 제대로 느꼈다.
금요일에 근무 중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엄마가 직장 앞까지 태우러 갈테니 퇴근 후 가족들과 같이 외식을 하고 집으로 오자는 내용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현재 나에게 있는 것은 책 한 권과 외출 필수품(파우치, 지갑, 무선 이어폰)이다. 자취방에 들러서 먼저 짐을 챙긴 다음 식당으로 바로 간다고 할까, 부모님 차를 타고 편하게 식당으로 바로 갈까. 고민 끝에 가방에 책 한 권이 있으니 엄마 차를 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예상했겠지만 그것은 매우 잘못된 선택이었다. 어제는 본가 근처에서 독서모임이 있는 날이어서 직장에 들고 갔던 책은 독서모임 선정 도서였다. 즉, 독서모임에 다녀온 후에는 읽을 책이 없다는 뜻이다! 이 사실을 어제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나는 독서모임이 끝난 후 반드시 책 한 권을 사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제 독서모임에서는 꽤 재미있는 것을 했다. 바로 와인 시음회였다. 화이트와인을 두 잔 마시니 슬며시 취기가 올라왔고 나는 기분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해서야 아차 싶었다. 읽을 책이 없다! 활자 중독자에겐 너무 당황스러운 일이다. 책을 읽지 않더라도 읽을 책을 끼고 있어야 마음이 편한 것을. 어쩔 수 없이 글을 써야겠다 생각하고 동생에게 노트북을 빌리려고 하자, 동생은 월요일이 시험이라며 자기가 노트북을 쓰겠단다. 나는 졸지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잉여가 되었다. 얼마만에 느끼는 따분함인가. 할 일 없음은 당황스러움과 은근한 해방감을 함께 선사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붙잡고 침대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유튜브를 들어갔는데 볼 게 없다. 한참동안 영상을 1분정도로 짧게만 보며 시청할 영상을 서칭했다. 그런데 아, 보고 싶은 영상이 없다. 그렇게 무료하게 몇 시간을 버렸다. '펜을 들고 종이에 글이라도 쓸 걸'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1분 단위로 주의를 전환하던 산만한 뇌가 그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책상에 앉아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빠르게 포기한 후 잠을 자려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잠이 안 온다. 잠이 올 때까지 핸드폰으로 시덥잖은 영상을 보다가 새벽에 겨우 잠에 들었다. 영양가 없는 유튜브 영상만 보며 반나절 이상의 긴 시간을 날리는 건 꽤나 힘든 일이었다. 눈도 아프고, 어깨도 뻐근하고, 머리도 멍해진다. 앞으로는 본가에 올 때 배낭을 꼭 챙길 것이다. 그런데 가끔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마음껏 따분함을 느끼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하다.
* 이 글을 읽을 때 추천곡 : 선우정아-'뒹굴뒹굴(piano trio 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