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냐 Jan 07. 2024

책을 훔치던 소녀, 작가가 되다.

마커스 주삭 <책도둑>

# 책 요약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시기에 살던 말과 책을 사랑한 독일인 소녀의 이야기. 다양한 관계과 시대 상황의 영향으로 소녀가 작가로 성장하는 내용이다.


# 감상(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


1. 이 소설의 아름다움에 대해

 '아름답다’라는 감상은 이 책의 특정한 요인으로 인해 나온 것이 아니다. 다양한 요인들이 어우러져 이 책이 아름답다고 기억되는 것 같다. 먼저 이 책의 문장들이 참 예술적이다. 작가는 인물의 감정이나 어떤 상황의 분위기를 감각적으로 묘사함으로써 한 편의 서정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아름다운 문장들에 모두 밑줄을 치면 거의 모든 문장에 밑줄이 쳐질 정도로 이 책은 수려한 문장들로 가득 차있다.

부엌 찬장은 생긴 모양이 죄책감 같았다. 그의 손바닥은 자신이 한 짓의 기억으로 미끌거렸다. 땀이 날 수밖에 없어. 리젤은 생각했다. (p.579)
가끔 지하실에서 잠에 깨면서 리젤은 귀로 아코디언 소리를 맛보았다. 혀에 샴페인이 달콤하게 타오르는 느낌이 났다.(p.518)

다음으로 인물의 심리는 알 수 있지만 인물과 멀리 떨어져 전체를 조망하는 전개 방식이다. 이 소설의 서술자는 죽음의 신으로 3인칭 관찰자 시점과 전지적 작가 시점을 넘나 든다. 인물의 속마음은 알지만 인물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셈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우리를 인물의 삶 안으로 끌어들이기보다 멀리 떨어져 관찰하게 함으로써 더 넓은 시각을 갖게 한다. 이러한 점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은 비행기가 이륙할 때 창문으로 보이는 지역의 전경과 같은 아름다움이다.

마지막으로 인물들 간의 관계가 주는 아름다움이다. 이 책은 리젤 메밍거라는 소녀를 둘러싼 다양한 관계를 다룬다. 투박하고 거칠지만 친근한 양어머니 로자 후버만, 낭만적이며 한없이 자상한 양아버지 한스 후버만, 세심함과 순수함을 지닌 유대인 막스, 서늘한 인상 이면에 따뜻함을 품은 일자 헤르만... 리젤 메밍거와 이 매력적인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랑과 우정의 이야기는 소설을 더 풍성하고 깊게 만든다. 리젤 메밍거의 성장이 이 모든 인물들의 영향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인간관계에 대한 경이가 느껴지기도 한다.


2. 작가와 말의 불화

 <책도둑>에서 가장 핵심적인 서사는 가족 이야기도, 사랑 이야기도, 우정 이야기도 아니다. 바로 한 소녀가 작가로 성장하는 이야기다. 리젤 메밍거는 말에 매료되어 책을 소유하고 읽고자 노력하고 결국 책을 쓰게 된다. 하지만 리젤이 말을 사랑하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말의 악용으로 지옥이 되어버린 시대(나치시대) 때문에 말을 사랑하는 것에 죄책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리젤이 느낀 말과의 불화는 작가가 반드시 겪는 일종의 통과의례라 생각한다. 리젤의 시대 배경이 다소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어떤 시대이든지 말을 악용하는 사람들은 존재하고 그로 인한 영향은 언제나 상당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시대와의 불화에 시달리는 존재로서 말의 악용을 더 예민하게 감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말 자체에 애증의 감정을 갖게 된다. “이 예쁘장한 나쁜 새끼들”이라는 리젤의 말처럼.

그런데 이러한 애증의 감정은 오히려 말 자체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열어주고 더 진지한 자세로 말을 활용하게 만들어준다. 리젤이 쓴 책 '책도둑'의 마지막 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말을 미워했고, 나는 말을 사랑했다. 어쨌든 나는 내가 말을 올바르게 만들었기를 바란다.” 올바른 말을 지향하는 성숙한 작가의 태도를 갖게 된 리젤을 보며 괜스레 대견한 마음이 든다.                                                                                                 


3. 저주스러운 말 vs 반짝이는 말

그렇다면 말의 선용과 악용은 무엇일까. 에필로그에서 이 책의 서술자인 죽음의 신은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어떻게 똑같은 일이 그렇게 추한 동시에 그렇게 찬란할 수 있냐고, 말이라는 것이 어떻게 그렇게 저주스러우면서도 반짝일 수 있냐고 물어보고 싶었다.(p.785)

저주스러운 말과 반짝이는 말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책의 내용을 떠올리며 생각해 보았다.


- 배척과 결집의 원천(저주스러운 말)

히틀러의 말은 유대인에 대한 근거 없는 루머를 사실인 것처럼 교묘하게 포장하여 독일인들로 하여금 유대인을 배척하도록 유도하는 말이다. 배척과 결집은 반대의 개념 같지만 사실 배척과 결집은 항상 함께 존재한다. 배척이 결집을 이루면 결집이 배척을 강화하고, 이 과정이 순환되며 결집은 더욱 공고해지고 배척에는 엄청난 공격성이 응축된다. 히틀러의 말은 이렇게 독일인끼리의 공고한 결집과 유대인이라는 외부 집단에 대한 응축된 공격성으로 결국 인간이 저지를 수 없는 끔찍한 참사를 낳는다. 가장 저주스러운 말의 사례이다.


- 관계 형성의 원천(반짝이는 말)

반면 반짝이는 말은 리젤이 경험한 바와 같이 관계를 형성하는 말이다. 결집과 관계 형성은 표면적으로 비슷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둘을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점은 외부 세계에 대한 공격성의 유무이다. 관계 형성은 외부 세계에 대한 공격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결집보다 품위 있고 이루기 어려운 것이다. 어떤 이의 은유가 다른 이의 가슴을 공명시킬 때 비로소 말로써 결합된 우정이 형성된다. 리젤은 나치를 피해 지하실에 숨어있는 막스에게 그날의 하늘을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해 준다.

"오늘 하늘은 파래요. 막스, 크고 긴 구름이 하나 있어요. 밧줄처럼 길게 뻗어 있어요. 그 끝에 해가 노란 구멍처럼 달려 있어요......"(p.363)

이 말을 들은 막스는 하늘을 상상하여 벽에 그림을 그리고 이렇게 쓴다.

월요일이었다. 그들은 밧줄을 걸어 해를 향해 다가갔다. (p.364)

나이와 성별, 인종이 다른 그들을 이어주는 매개체는 오로지 말이다. 말은 그들이 같은 세계에 소속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일종의 암호이며, 자신의 내면세계로 상대를 초청하는 행위이다. '단어들의 조용한 집합에 의해 묶여 있는' 그들의 관계는 큰 감동을 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