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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냐 Jan 08. 2024

날카롭지만 따뜻한 시인의 시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

# 책 요약

러시아 체제의 변화와 전쟁으로 격변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 성장한 소년, 소녀들의 이야기


# 감상(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


 <닥터 지바고>로 언젠가는 읽어야지 했던 러시아 문학을 처음 접했다. 결론적으로는 지금까지 읽었던 책 중 손에 꼽힐 정도로 좋았던 책이지만, 마냥 좋기만 하지는 않았다. 러시아 고전의 참된 아름다움을 느끼려는 자, 시련을 이겨내라!


1. 이 책이 페이지 키퍼가 된 이유

 <닥터 지바고>는 너무나 읽기 어려운 소설이었다. 페이지가 이렇게 안 넘어가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거의 총.균.쇠 이후로 처음인 듯?) 그래서 이 책을 페이지키퍼(page-keeper)로 정의했다. 페이지 키퍼는 page-turner(책장 넘기기가 바쁠 정도로 흥미진진한 책)의 반대말로 '책장을 못 넘기도록 막아주는 책'이라는 뜻이다. 왜 이렇게 안 읽히는지 생각을 해보았는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   

이름이 너무 어려움

이름을 매번 똑같이 표기해도 어려울 판에 무슨 애칭이며 별칭이 많이 등장해서 같은 인물인지 식별하는 것도 어려웠다. 관계도를 그리며 읽었는데, 수시로 인물을 표시하고 인물들 간의 관계를 확인하다 보니 흐름이 계속 끊겼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배경지식 부족

초반에는 러시아 혁명을 비롯한 당대의 정치적 담론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하다 보니 내용을 이해하기도 어렵고, 소설 속 세계가 생생하게 그려지지 않아 이 책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와 관련된 내용은 뒤에 나온다.

시적인 문장들

시적인 문장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좋아한다. 이 책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문체는 읽는 사람을 홀리는 매력이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가뜩이나 인물을 식별하고 상황을 파악하기에도 벅찬데 문장도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니 더더욱 잘 안 읽혔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대단한 소설임은 틀림없다. 정말 정교하게 세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관계도를 그리며 그 정교함을 확실하게 느꼈는데, 이 소설에서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하나 이상의 고리로 엮여 있다. 50명가량의 인물들이! 이렇게 정교한 관계성 만으로 대단한 소설 아닌가.


이 소설이 위대한 또 다른 이유는 작가가 주인공 지바고의 말을 빌려 러시아 혁명을 소신 있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째, 10월 이후 이해되기 시작한 총체적 완성의 이념은 나를 뜨겁게 하지 않습니다. 둘째, 이 모든 것이 실현되려면 아직 요원한데, 그것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논하는 데만 이런 피바다를 지불했으니,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는 못할 듯합니다. 셋째, 이것이 핵심인데, 삶의 개조 같은 말을 들으면 나도 자제력을 잃고 절망에 빠져들게 됩니다. (p164)

와, 정말 속시원하지 않은가. 이렇게 우회 없이 직설적으로 정권을 비판한 작가의 용기에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다. 실제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는데, 작품의 관점이 사회주의 혁명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국외추방의 위기에 놓이자 수상을 포기하였다. 안타까운 사연이다.



3. 이 소설이 나에게 주는 의미

 <닥터 지바고> 독서는 지난하지만 아주 의미 있는 여정이었다. 이 어렵고 난해한 듯한 소설은 무엇을 남겼는가.


첫째, 러시아 혁명에 대해 관심을 갖고 앎의 지평을 넓힌 것이다. 러시아 혁명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러시아 혁명의 배경과 과정을 공부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내용을 이해해야 하니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배경을 이해하고 소설을 읽으니 러시아 혁명이 생생하게 다가와 이 사건이 새롭고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래서 러시아 혁명에 대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관련된 글을 읽고 영상을 찾아봤다. 내용 이해를 위한 억지 공부에서 호기심과 흥미를 바탕으로 하는 공부가 된 것이다. 이 경험은 나의 지식 체계 확장이라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지만, 앞으로의 독서에도 영향을 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둘째, 절대 잊히지 않을 명문장을 발견한 것이다.

잘 가, 나의 위대하고 사랑스러운 그대, 잘 가, 나의 자랑, 잘 가 나의 빠르고 깊은 시냇물이여, 하루 종일 출렁이는 당신의 물소리를 정말 사랑했고, 당신의 차가운 물살에 몸을 던지는 것을 정말 사랑했어.(p446)

이런 위대하고 사랑스러운 문장이 있나! 사람을 시냇물에 비유하는 생각을 어떻게 한 걸까. 이 문장은 지바고의 불륜녀(...) 라라가 죽은 지바고에게 하는 말이다. 불륜이라는 찜찜한 사랑이긴 하지만 이 문장에는 지바고를 향한 라라의 절절한 사랑이 온전히 묻어나 있고, 지바고라는 인물의 성품과 특징을 적확하게 묘사하여 참 인상적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나의 마음을 남김없이 전할 수 있는 라라의 능력이 부러울 따름이다.


 셋째, 러시아의 격변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 인물들이 가지는 사상과 삶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본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보수적인 인물, 진보적인 인물, 급진적인 인물 모두 저마다의 관점과 행동 양식을 가지고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간다. 2020년대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나와는 전혀 관련 없는 시대와 공간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인물들을 보며 그들의 삶을 어렴풋하게 상상하게 된다. 타인을 이해하는 힘은 나와 전혀 관련 없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굳이 찾아보고, 문장과 행간 속에 녹아 있는 그의 삶을 이해하고자 애쓸 때 커지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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