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 프랜즌 <자유>
네 명의 성인의 비뚤어진 자유와 그로 인한 책임을 그린 소설
'자유’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의 이야기는 자유라는 키워드로 꿰어진다. 나에게 있어 자유하면 생각나는 작품은 <노예 12년>이다. <노예 12년>은 어느 날 납치를 당해 민간인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노예가 된 흑인 주인공이 자유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의 영화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다루는 자유는 <노예 12년>에서 다루는 자유와 대척점에 있다. <노예 12년>에서는 자유가 없는 세계에서 인물이 추구하는 숭고한 가치로서의 자유를 다루지만, <자유>에서는 무한한 자유의 세계에서 악용되는 자유를 다룬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는 자유의 한복판에 사는 미국 작가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이야기라 생각된다.
책의 내용은 아주 추잡하기 그지없다. 부부가 맞바람을 피고(심지어 아내는 남편의 오래된 절친과), 아들은 고등학생 때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성인이다) 살겠다며 집을 나간다. 심지어 아내와 바람난 남편의 절친은 어린 여성들을 ‘영계’라 부르며 하룻밤을 즐길 상대로만 취급한다. 참 어지러운 관계이다. 이들의 행위의 기저에는 이들의 타락한 도덕성 이외에 더 중요하고 거대한 무언가가 숨어 있다. 바로 ‘원초적 자유’이다. '원초적 자유'란 개인의 욕구에 따라 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진정한 자유라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우선 원초적 자유는 인간의 동물적인 욕구에 따른 삶을 살게 만들기 때문이다. 욕구가 이성을 이기고 주도권을 쥐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필요충분조건은 이성이지만 자유로 인해 이성의 힘이 약해져 인간의 인간다움을 잃게 된다. 둘째, 자유란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데, 원초적 자유는 특수한 상황(노예제도나 사회주의 체제 등)이 아니라면 무엇이 속박인지 알 수 없다. 벗어나고자 하나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지 모르는 것. 따라서 원초적 자유는 실체가 없는 허울뿐인 개념이다. 셋째, 원초적 자유를 추구하면 할수록 불행에 빠지는 모순된 상황이 발생한다. 소설 속 인물들처럼 원초적 자유를 누릴수록 길을 잃고 행복을 잃게 되는 것이다. 아내(패티)와 남편(월터)은 불륜을 통해 진짜 사랑을 찾아간 줄 알았으나 그 관계에서 허무를 느낀다. 아들(조이)은 가족을 떠났기 때문에 자신의 고통을 호소할 대상이 없어 외로워한다. 남편의 절친(리처드)은 성욕에 충실한 삶을 살다 결국 패티가 떠나 완전히 혼자가 된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소설에서 보이는 것처럼 온전한 자유라 할 수 없다.
불쾌하고 역겨운 부분이 많았지만 인간의 자유의 한계를 또렷하고 적나라하게 나타내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이 마음에 들었다.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원초적 자유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헛되고, 심지어는 위험하기까지 한지 깨닫고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