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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냐 Jan 20. 2024

아름답지만 불편한, 불편하지만 아름다운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 책 요약

온천마을에서 벌어지는 미묘하고 매혹적인 관계를 그린 소설     


# 감상(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    


최근에 삿포로로 여행을 갔다. 어떤 책을 가져갈까 고민할 여지도 없이 책장에서 『설국』을 꺼내 들었다. 처음 『설국』을 읽었던 건 작년 이맘때였다. 이 책에 대한 첫 감상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덧붙일 말이 없다’였다. 수려한 문장으로 묘사된 설산의 정경, 요염하고 야릇한 장면들, 감탄이 나오는 세련된 비유들로 책을 읽는 내내 황홀했다.      

여행지에서 『설국』을 읽으며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느꼈던 감정을 배로 느끼길 기대했지만...     

어라...?     

처음 읽었을 땐 느끼지 못한 불편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 책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여성을 대하는 주인공의 태도는 신발 속에서 굴러다니는 자갈처럼 읽는 내내 나를 불편하게 했다. 이 소설은 아름답지만 불편하고, 불편하지만 아름답다.     

   



1) 배경이 주는 아름다움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이 책의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다양하다. 그중에서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바로 이 책의 배경인 ‘설산’이다. 설산은 이 소설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떻게 이 소설을 아름답게 만드는가?          


-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 형성     

어딘가 아련하고 비현실적인 소설의 분위기를 설산이라는 공간적 배경이 만들어준다. 작가는 첫 문장부터 눈으로 뒤덮인 몽환적인 산속 마을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설산이 만들어낸 분위기로 인해 인물들 간의 관계가 한층 더 깊어지고 애틋해지는 것 같다. 삿포로 여행에 가서도 『설국』의 인물들과 장면들이 떠오르며 괜스레 아련해졌는데, 여행 장소를 한층 더 매력적이게 만들어준 이 소설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 인물들의 관계를 상징     

시마무라와 고마코는 정식 연인 사이가 아닌 여행객과 게이샤(화류계 여성)의 관계이다. 둘 사이에는 분명 끌림이 있지만 그들의 미묘한 감정은 그들을 현실의 연인으로 이어 줄 수 없다. 연인과 유사한 그들의 관계는 특정 공간에서만 유효하며 시마무라가 마을을 떠난 후에는 효력이 없어진다. 분명 존재하지만 아무런 힘이 없는 이들의 관계는 아름답지만 곧 녹아 없어질 눈과도 같다.          



2) 남성 중심 소설이라는 불편함     

이 소설의 주인공은 가정이 있는 남성인 시마무라다. 소설의 첫 부분부터 그는 같은 열차에 탄 어떤 처녀(요코)에게 눈길을 주는데, 그의 호색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여관 게이샤 고마코와의 유사 연인 관계로 이어진다. 고마코와 미묘한 감정을 나누면서도 시마무라는 요코로부터 시선을 뗄 수가 없다.     


남성 주인공의 호색은 고전 소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소재다. 대표적으로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토마시가 그렇다. 토마시의 애인 테레사는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여성들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는 그 때문에 극심한 불안감을 느낀다.      


소설이 꼭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남성 캐릭터들의 주체 못하는 성욕은 불쾌감을 자아낸다. 좀 웃기긴 하지만, 『닥터 지바고』에 나온 불륜 관계(지바고와 라라의 관계)는 별로 불쾌하지 않다. 적어도 그들의 관계는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그렇다고 불륜을 옹호하는 사람은 아니니 오해 마시길...)     


그런데 『설국』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남성 캐릭터가 관계의 칼자루를 쥐고 있다. 즉, 여성과 남성의 관계가 동등하지 않다는 것이다. 『설국』에서 시마무라와 고마코는 겉보기엔 서로 애정이 싹트는 관계인 것 같으나, 안타깝게도 이 관계는 쌍방향이 아니다. 고마코는 명백히 시마무라에게 애정을 보인다. 그녀는 자신에게 중요한 인물이 위독하다는데도 시마무라에게 와서 밤을 보내며, 시마무라를 배웅하느라 그의 임종마저 지켜보지 못한다. 그에 반해 시마무라가 고마코에게 느끼는 감정은 육체적인 욕망과 호기심 딱 그 정도이다. 이 부분에서 고마코의 애정에 대한 시마무라의 무심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고마코의 애정은 그를 향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아름다운 헛수고인 양 생각하는 그 자신이 지닌 허무가 있었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불평등한 관계의 희생자는 왜 항상 여성이어야 하는가.

여성을 한 명의 인격체가 아닌 그들의 성욕을 채울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토마시도, 시마무라도 재수없다.

    



전혀 예상치 못한 감상으로 흘러갔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감상이 나오는 것이 바로 고전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여전히 나는 『설국』을 좋아한다. 지금껏 읽어왔던 소설 중 가장 아름다운 소설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불쾌감도 처음 느꼈던 황홀함 못지않게 소중한 감상이다. 작품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충분히 흐른 뒤 이 소설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 그땐 어떤 감상을 갖게 될까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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