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 가리 『자기 앞의 생』
이슬람계 소년 모모와 그를 키워준 로자 아줌마의 가족애.
마냥 따뜻하고 밝은 소설은 아니다.
3년 전에 이 책을 처음 읽었고, 방금 2번째로 완독 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땐 마지막 장면에 대한 감동이 너무 커서 ‘인생책’으로 꼽을 정도로(그 당시 나는 인생 뭐시기라는 말을 좋아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좋아했다. 지금은 글쎄, 독서 모임을 위해 급하게 읽어서 그런지 그 정도의 감동은 받지 못했다. 대신 이 소설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이 마지막 장면(모모가 죽은 로자 아주머니를 유대인 동굴로 데려가 향수를 부어주고 화장해 주는 장면)을 향해 달려간다는 건 일부 맞는 말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다. 키워드인 ‘사랑’ 외에도 할 얘기는 많다.
1) 사랑
소설이 시작되기 전 페이지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그들은 말했다.
“넌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 때문에 미친 거야.”
나는 대답했다.
“미친 사람들만이 생의 맛을 알 수 있어.” -아파, 라우드 알 라야힌
이 글귀는 소설 전반에 대한 스포일러이다. 초반에 모모는 세상사에 통달한 이웃 하밀 할아버지에게 질문을 던진다.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
하밀 할아버지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차만 한 모금 마신다. 다시 질문했을 땐 “그렇단다.”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모모는 하밀 할아버지의 대답을 정답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소설 맨 마지막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는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
사랑해야 한다.
이 소설의 메인 테마는 ‘사랑’이며 작가는 로자 아줌마와 모모의 관계를 통해 사랑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모모는 왜 “사랑하면 좋다.”가 아닌 “사랑해야 한다.”라는 결론을 내렸을까?
- 인격적인 성숙
먼저 인격적인 성숙을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모는 관심을 끌기 위해, 그리고 로자 아줌마에게 복수하고자 아파트 곳곳에 똥을 갈기는 등의 행위를 하던 미성숙한 소년이었다. 그런데 로자 아줌마가 아프면서부터 아줌마에게 사랑을 받기만 하다 주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이후 모모는 점차 성숙한 면모를 보인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줌마를 생각하며 일찍 집에 들어간다거나, 아줌마를 씻기고 병시중을 들고, 다른 양육자가 다가와도 아줌마 곁을 떠나지 않으며 의리를 지킨다. 사랑을 받기만 했다면 모모의 인격이 이렇게 성숙할 수 있었을까?
- 삶의 버팀목
다음으로 사랑은 삶의 버팀목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모모의 삶은 그야말로 최악이다. 매춘, 마약 등 온갖 유해한 것들로 둘러싸여 있고, 언제 사회복지사가 찾아올지 몰라 긴장하며 숨어서 지내야 한다.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입양되어 로자 아줌마의 집에서 나갔고, 나중에 알게 된 아버지의 정체는 엄마를 죽인 범죄자였다. 심지어 자기 연민을 잔뜩 안고 있는. 이런 취약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모모가 계속 살아가게 만들었던 동력은 로자 아줌마에 대한 애정과 그녀를 보살펴야 한다는 의무감이었던 것 같다. 모모는 우리에게는 서로밖에 남지 않았다고 표현하는데, 서로가 없었다면 그들은 과연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갔을까?
2)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하여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고 삶의 원동력이 되어주는 관계라 할지라도, 슬픈 것은 그들이 개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같은 삶을 살 수 없고 자기 앞의 길을 가게 된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의 생(홀로코스트, 매춘, 불법 보육원 운영 등으로 이루어진...) 을 따라가지 않는다. 그의 앞에는 새로운 양육자인 나딘이라는 사람이 나타났고, 그래서 매춘 중개인이나 포주가 되지 않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 험한 삶의 되물림을 끊을 수 있다는 점이 다행이라 생각되면서도, 각자 자기만의 길이 있다는 것이 어딘가 서글프게 느껴진다. 모모는 어떤 길을 가게 될까. 세상 물정을 다 아는 척하지만 여리고 순수한 아이의 앞에는 축복의 길이 펼쳐지길 바란다.
3) 플로리다 프로젝트
매춘부에게는 친권이 없어 자식을 불법 보육원에 맡긴다는 이 소설의 배경은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떠올리게 만든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아이를 양육할 경제적 능력이 부족하고 매춘으로 돈을 버는 여성으로부터 아이를 분리시켜 보육 시설로 보내려는 움직임을 피해 모텔에서 사는 모녀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를 보면 주인공 무니가 엄마와 사는 것이 정말 이 아이에게 도움이 될까?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이 소설도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같은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모모가 빈민구제소나 보육시설로 가는 것보다 로자 아줌마와 함께 사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인가?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보기 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나는 아마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생각이 많아진다.
두 가지 선택지 모두 장단점이 있다. 빈민구제소로 가는 것의 장점은 사회 규범의 선 안에서 자랄 수 있다는 점이다. 즉, 비교적 범죄로부터 안전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다는 것이다. 로자 아줌마와 함께 살 때의 모모는 갖가지 범죄에 너무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범죄(마약, 매춘, 도벽 등)에 대해 무감각한 상태다. 사회 규범을 내면화하지 못한 아이는 범죄자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로자 아줌마의 밑에서 자라는 것의 장점은 안정적인 1:1의 애착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 복지시설에서 아동은 한 개인으로서 대우받는 것이 아니라 복지의 대상이자 수많은 아이들 중 한 명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모모가 빈민 구제소로 보내지는 것을 끔찍이 싫어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이러한 점들을 생각했을 때 빈민 구제소로 보내는 게 아이를 위해 더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나딘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모모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 모모 같은 사춘기 소년은 자신만의 확고한 기준이 없어 주변 환경의 영향을 여과 없이 받기 때문에 비행의 수위가 더 높아질 수 있다. 아무리 양육자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가장 취약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피어난 고결한 사랑의 이야기이다. 로자 아줌마와 모모의 관계는 삭막한 현대인에게 충격과 자극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