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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나오 Dec 05. 2023

아이들의 계절

시골 소녀의 추억이야기

아이들은 봄이 좋다. 앞산, 뒷산에 울긋불긋 진달래가 지천이다. 개울도, 마른 가지도, 온 들의 대지도 겨우 내내 걸어 잠근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꽁꽁 얼어붙어 개구쟁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 준 개울은 하늘 가득 기지개 켜는 개구리에게 졸졸졸 인사한다. 아이들은 봄을 기다렸다. 물 찬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양쪽 끝을 세게 잡고 서로 엇갈리게 오른쪽, 왼쪽으로 비틀어 몸통과 껍질 사이가 헐거워지게 했다. 한 손으로는 몸통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몸통에서 껍질과 분리된 나무만 뽑아냈다. 숨을 참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해야 한다. 서둘다가 껍질이 갈라지면 피리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공들여 겨우 뽑아낸 어린 버드나무 껍질을 작은 손가락 세 마디 길이로 잘라 여러 개로 만든다. 통통 튀는 맑은 소리를 내기 위해 입이 닿는 쪽은 껍질을 한 번 더 살짝 벗겨낸다. 잘 만들어진 버들피리를 제각각 하나씩 입에 물고, 아이들은 행복하다. 여 일곱 명이 ‘피리리’ 소리를 내며 산으로 들로 뛰어다닌다. 맑은 버들피리 소리는 아이들의 웃음과 함께 온 마을을 순식간에 가득 채운다. 들에서 밭을 갈며 한 해 농사 준비를 하는 어른들의 땀을 식혀주고 허리를 펴게 한다. 아이들은 온종일 뛰어다닌다. 그게 아이들의 일이다.

“주야, 저녁 먹어라.”

“희야, 저녁 먹어라.”

“정아, 저녁 먹어라.”

밥 먹을 시간이다.      


아이들은 여름이 좋다. 여름방학 아침 8시,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네 어귀에 모였다. 손에는 무엇인가 하나씩 들고 있다. 마른 흙길과 자갈길을 지나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못에 물이 깊고 송사리 떼가 줄지어 다닌다. 아이들은 납작하고 큰 돌들을 모아 넓은 방을 만들었다. 한쪽에는 간식으로 챙겨 온 자두, 복숭아, 감자, 옥수수랑 점심으로 먹을 라면과 김치를 잘 챙겨두었다. 가장 큰 아이가 학교에서 배운 준비운동을 지휘한다. ‘하나, 둘, 하나, 둘’ 준비운동 흉내만 내고 물속으로 뛰어든다. 개구리헤엄으로 건너편 바위에 먼저 도착한 아이는 의기양양하게 뒤따라오며 허구적 열심히 물장구치는 아이들을 재촉한다. 그 일을 수없이 반복하다 몸이 지치고 입술이 파래지면 돌로 만들어 놓은 방으로 들어간다. 누웠다가 엎드리기를 반복하며 몸을 따뜻하게 한다. 해가 머리 꼭대기에 다다르면 나이 든 여자아이들이 냄비에 개울물을 담아오고, 남자아이들은 돌을 쌓아 만들어 놓은 아궁이에 마른풀과 나뭇가지를 모아 성냥으로 불을 붙여 라면을 끓인다. 삶은 햇감자에 김치를 얹어 먹고, 뜨거운 라면 국물로 속을 채웠다. 한 입 베어 문 복숭아 향기는 온종일 기분 좋다. 물과 돌방을 번갈아 왔다 갔다 하며 아이들은 해지는 줄 모른다.

“주야, 저녁 먹어라.”

“희야, 저녁 먹어라.”

“정아, 저녁 먹어라.”

밥 먹을 시간이다.      


아이들은 가을이 좋다. 가을이 되면 타작을 마친 논에 어른 주먹 서너 개 정도 두께의 볏단이 태산을 이룬다. 어른들은 그것들을 잘 챙겨두었다가 소여물로 쓰거나 숙성시켜 이듬해 농사에 거름으로 다시 밭으로 내놓는다. 별다른 놀잇감이 없어 호시탐탐 재밋거리를 찾아다니는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놀이동산이었다. 볏단을 한 단씩 쌓아 올려 첨성대를 만드는 아이, 타고 싶은 어떤 자동차를 만드는 아이, 높게 쌓인 볏단 무더기 꼭대기에 가만히 앉아서 자신이 왕이라고 우기는 아이, 볏단 던지기를 하며 장난치는 아이, 주위의 시끄러운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끔 보이는 메뚜기를 잡으러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아이, 서로 다른 방법으로 놀았지만, 모두가 즐겁고 신났다.

“주야, 저녁 먹어라.”

“희야, 저녁 먹어라.”

“정아, 저녁 먹어라.”

밥 먹을 시간이다.      


아이들은 겨울이 좋다. 추운 겨울이 되면 산에도 들에도 개울에도 온통 새하얀 눈으로 덮인다. 어른들은 한 해의 수고를 위로하며 따뜻한 온돌방에서 여유 있는 하루를 보냈다. 그에 반해 아이들은 겨울에도 바빴다. 눈이 적당히 쌓여 비닐포대로 썰매 타기 좋은 곳을 미리 알아두기, 앉은뱅이 손 스케이트를 지치기에 개울물이 적당히 얼었는지 확인하기, 동네 아이들이 번갈아 타며 다 같이 놀기에 손 스케이트와 비닐포대의 수량을 확인하기 등 어른들의 농사일보다 더 치밀한 준비와 계획이 필요했다. 물론 누구도 계획을 하거나 강요한 일은 아니지만 시골 작은 동네 놀이터엔 나름의 규칙과 역할이 있었다. 대부분 6학년 이상 된 형들이 자발적으로 이끌어 주었고, 동생들은 잘 따랐다. 그렇게 아이들은 시린 손을 입김으로 호호 불어가며 겨울에는 개울과 산기슭에서 나무로 만든 손 스케이트로 얼음을 지치고, 눈썰매를 타며 신나게 놀았다. 가끔 형들이 추워하는 동생들을 위해 마른 나뭇가지와 낙엽으로 모닥불을 지펴주고 감자, 고구마도 함께 구워 먹었다. 아이들은 마냥 즐겁고 행복했다.

“주야, 저녁 먹어라.”

“희야, 저녁 먹어라.”

“정아, 저녁 먹어라.”

밥 먹을 시간이다.      

아이들은 해가 넘어가는 들녘에서 돌아올 해를 기다린다. 아이들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어른들은 자꾸만 밥 먹으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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