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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llie 몰리 Mar 12. 2024

쇼핑몰에서 중국 여자한테 날벼락 맞은 날

당신 아이한테 먼저 뭐라고 하시지요.

한국에 살면서 지금까지 모르는 누군가가 내게 소리를 치며 화를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해외살이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는 법. 베이징에서는 내 인생에 없던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주로 질서에 관한 일들이다. 올해 초, 얼굴도 모르는 여자가 내게 중국어 폭탄을 던졌다. 그것도 있는 다짜고짜 힘껏 말이다.


중국의 최대 명절인 춘절과 10월의 국경절은 일주일이 넘는 최대의 연휴 기간이다. 그때 각 지역 도시 간 이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로 베이징에서도 타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날이기도 하다. 관광지, 쇼핑몰, 식당에도 평소보다 사람이 훨씬 붐비고, 지하철을 타면 가족들끼리 캐리어나 무거운 짐가방을 든 모습이 한눈에 딱 봐도 놀러 온 사람임을 알 수 있다. 혹시 모를 계절을 대비한 패션과 스타일에서도 보이는 다름이 있다.


불과 한 달 전인 올해 춘절, 베이징을 떠날 준비를 하는 우리 가족은 Good bye Beijing을 모토로 다시 한번 가고 싶은 관광지, 식당, 그리고 추억의 장소들을 가보는 일정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연휴 때 할인 폭이 컸던 기억이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를 돌려서 자주 가던 쇼핑몰을 갔다.


엄청 많은 인파에 갈까 말까 망설였지만, 주차 상황을 보니 생각보다 갈만한 정도여서 기분 좋게 쇼핑몰을 들어섰고, 늘 우리가 가던 브랜드 매장에 들어갔다. 쇼핑을 좋아하지 않는 우리 가족은 정말 필요한 물건만 사고 바로 몰을 빠져나오는 편이라서 쇼핑 시간이 길지 않다. 아들 역시 쇼핑이라고 하면 이미 출발 전부터 쇼핑은 싫다며 노래를 해대서, 혹여나 그나마 뭐 하나 고르려면 시간이 걸리는 내 입장에서는 초단시간에 스캔한 후 빠른 착장과 동시에 매장을 나와야 한다.



이 날 역시 기본 50%의 할인율을 자랑하며 득템을 위한 나와 남편의 민첩성은 최대치였다. 아들은 매장의 갑갑함과 냄새, 또 먼지 알레르기가 있어서 재채기가 연신 나오자 밖에서 기다린다며 혼자 음악을 즐기고 있었고, 남편 역시 휙 하고 둘러보다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고, 눈이 뻑뻑해서 혼자 보고 오라며 아들과 함께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어떻게든 세일템 하나를 사보겠다는 신념으로 나는 여성의류 쪽으로 향했고, 3벌 정도의 옷을 골라서 피팅룸으로 향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평화롭게 줄을 선 모습이었고, 나의 순서는 4번째였다. 가끔 중국에서 피팅룸을 이용할 때 황당했던 경험 중의 하나는 피팅룸을 이용하는 가끔 보이는 중국인들의 방식이었다. 자신이 들고 들어간 옷을 입고 맞지 않거나 원하지 않으면 들고 나오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은 자리를 잡고, 동반한 가족이나 아이를 시켜서 같은 옷을 다른 사이즈로 다시 가지고 오게 해서 뒤에 줄이 있든 말든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을 때까지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고, 직원도 별로 말리지 않는 점을 보며 말도 못 하는 외국인으로서 그냥 한숨 쉬며 기다릴 때가 많았다.


그런데 이 날은 살면서 상상도 못 할 일들이 일어났다. 그날도 무슨 이유인지 3개의 피팅룸의 문이 열릴 생각을 하지 않자, 제일 먼저 기다리던 여자는 갑자기 피팅룸 문의 안쪽의 구석진 벽으로 자신의 일행을 데리고 갔다. 구석이라고 해도 줄 선 곳에서 그 여자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다 보이는 구조였다. 그 여자는 갑자기 자신이 입고 있던 바지를 홀라당 벗더니, 한 피팅룸 문의 손잡이에 걸고, 새 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탈의에 그녀의 꽃무늬 내복을 볼 수밖에 없던 나는 웃음이 나면서도, 얼마나 마음이 급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했는지에 동감을 하고 있었다. 바지가 타이트하자, 일행과 함께 웃으며 이야기를 하다가 역시 일행은 한 사이즈 큰 옷을 가지고 왔고, 또 꽃무늬 내복을 선보이며 새로 가지고 온 옷을 입어보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여러 벌을 입어보았다.


마침 한 문이 열리고, 그 여자가 그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갑자기 내 뒤에서 빛보다 빠른 속도로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덩치 큰 여자 아이가 그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게 아닌가. 긴 줄이 보이지 않는지, 알면서도 일부러 그러는 건지, 바로 직원한테 제지를 당했다. 이 말과 함께.

排队 [paidui, 파이뚜이] 줄을 서세요.


그 여자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뒤에 줄을 섰고, 그 뒤로도 몇 차례나 문이 열릴 때마다 계속해서 빈 문으로 돌진하는 전형적인 뻔뻔한 새치기의 모습을 보였다. 맹랑한 여자 아이의 모습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계속 뭔가 걸리적거리는 느낌이 들다가, 드디어 문이 열리고 내 앞의 여자가 피팅룸을 들어갈 차례였다. 앞사람은 일행과 수다를 떠느라고 문이 열린 걸 보지 못했고, 또 그 틈을 타서 맹랑한 중국 여자 아이는 그 문으로 돌진하는 게 아닌가. 직원도 옷 정리를 하느라 그 모습을 보지 못했고, 나는 그 사이 언제 오냐고 남편과 아들한테 차례대로 전화가 와서 속이 타는 상황이었다.


다급한 나머지 슬쩍 내 앞사람의 어깨를 툭툭 치며 손가락으로 새치기를 시도하고 있는 여자 아이가 잡은 피팅룸의 문을 가리키며 당신이 들어갈 차례라고 알려주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여기저기서, 줄 서고 있는 사람들 조차 排队,  파이뚜이를 하도 외쳐서 자동으로 입력이 되었다. 나는 새치기를 일삼던 뻔뻔한 초등학생 여자 아이한테 뒤에 줄 서라고 바디랭귀지를 하며 넌지시 "파이뚜이"라고 이야기했다. 누가 봐도 외국인스러운 성조 없는 억양과 매가리 없는 "줄 서."였다. 급한 건 모두 마찬가지였고, 내 앞에서까지 지속적으로 새치기를 하자 속이 부글부글 끓었었다.


이제 내 순서다! 누구 한 명만 나오면 이 지옥 같은 곳을 빨리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울려대던 나의 전화기에 현재 상황을 전하며 곧 나갈 것을 가족들에게 알렸다. 그런데 몇 초 뒤에 들리지 않는 중국어 괴성이 들리기 시작했고, 그 소리는 생각보다 크고 또렷했다. 바로 내 귀에 대고 하는 말이라는 걸 알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혼잡한 쇼핑몰 속에서, 또 들리지 않는 중국어들이 늘 내게는 주변 소음과 같은 말뿐이라 상대의 고성이 나를 향한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뒤를 돌아보자, 새치기하는 여자의 엄마로 보이는 듯한 우락부락하게 생간 중국 여자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나한테 중국어로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게 아닌가. 당황스럽고 어이없고, 그 여자를 보며 내가 할 수 있던 말은 "당신 나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였지만, 현실은 "니 슈어 워 마?(너 나한테 말하냐?)"로 맞는지도 알 수 없는 유치 찬란한 더듬거리는 중국어뿐이었다. 나의 중국어 반응에 그 여자는 더 소리 지르기 시작했고, 뉘앙스가 "우리 애가 뭘 잘못했는데!" 아니면 "왜 우리 애한테 뭐라고 그래?" 이런 소리 같았다. 내가 들리는 중국어 단어였던 "워 더 하이즈(우리 애)" 어쩌고 저쩌고.


순간 나도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되는 중국어 단어로 더듬더듬하다가 중국어 폭탄에 맞설 한국어 폭탄을 장착하고 이제는 한국어로 이야기했다. 물론 그 여자처럼 무식하게 소리 지르는 게 아니라, 최대한 감정 없이 작지만 낮게 "지금 당신의 아이가 여러 번 새치기하는 거 보지 않았냐? 다들 바쁘고 줄 서 있다. 내 앞에서 또 새치기가 있었고, 그래서 줄 서라고 이야기한 게 그게 문제 있니?"라고 맞대응을 했다. 보통 상대가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듣고, 외국어를 하면 멈출 법도 한데, 그 엄마도 아이처럼 안하무인이었던 게, 나의 반응이 어떻게 나오든 말든 자신의 느낀 불쾌한 감정 표출을 최대한으로 하고,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짹짹거리는 듯한 쩌렁쩌렁한 중국어를 쏟아내고 있었다.


중국에 살면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사람 사이의 갈등이었다. 갈등이라고 하기에는 서로 벽 보고 이야기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 그 상황에 내가 자신의 아이한테 "줄 서."라고 한 마디 한 게 이렇게 분하고 화가 날 일인지. 그 옆에 서 있는 자신의 딸은 이 상황을 보며 무엇을 배울지. 자신이 이런 상황에서 여러 번 새치기를 하는 게 그 엄마의 태도로 잘못이 없는 상황으로 정당화되어 버렸던. 그냥 나는 자신의 딸에게 기분 나쁜 말을 한 말 못 하는 외국인일 뿐이었다.


끊이지 않는 고성에 상당히 기분이 나빴고, 피팅룸 문이 열리자마자 그 여자 얼굴을 한 번 째려보고, 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그 안에서도 이깟 옷 몇 벌 입어보려고 줄 서서 기다리다가 괜한 봉변을 당한 것 같아서 대충 입어보고, 안에서도 끊이지 않는 그 여자의 무식한 고성에 기분이 나빠서 나머지 옷은 입어보지도 않고 그냥 탈의실을 나와버렸다.


밖에서 녹초가 되어 있는 두 남자를 향해서 있었던 불쾌한 일을 이야기했더니, 남편도 그래서 자신은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아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춘절에는 사람이 많기도 하지만 각지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어서 괜히 이런 감정싸움이 날 수도 있는 걸 경험했다. 가끔 새치기를 하는 사람도 보고, 무질서한 사람들도 보지만, 이렇게 대놓고 감정을 드러낸다거나, 비신사적인 태도로 사람을 대하는 경우는 처음 봐서 중국을 떠나는 입장에서 코로나 이후로 오만 정이 다 떨어져서 다행이라고, 중국을 떠나기 싫을 정도로 애틋함만 있었다면 아쉬움이 컸을 텐데라며 혼자 마음의 위로를 하며 쇼핑몰을 떠났다.


해외살이는 그 나라에 살면서 내가 사는 나라에 정을 붙이고 이곳이 가장 좋은 곳이라고 마음의 주문을 걸고 살아야 그나마 외롭지 않게 정을 붙이며 살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가끔 불쾌한 에피소드들을 만날 때마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그들의 의식에 속이 터질 때가 종종 있다. 아, 내가 언어를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똑 부러지게 할 말 다 했을 텐데라고 땅을 치고 후회하며 역시 제대로 해외살이를 하려면 언어는 필수이자, 점점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점점 단단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사회주의인 이곳에서조차 내 아이에 대한 과보호는 대단한가 보다.


사진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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