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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llie 몰리 Jun 21. 2024

저는 헤드 교장을 만나야겠습니다.

아시안을 만만하게 보다가 큰코다치지.

학교 측에서는 곧바로 ICT 부서를 통해서 더 이상의 온라인 수업 중의 피해가 없도록 시스템 구축을 하는 듯했고, 전체 메일로도 온라인 수업 규칙과 친구들과의 관계와 예절에 대한 기본적인 안내 메일이 나갔다. 온라인 수업이 끝나면 학년별로 어셈블리를 통해서 뭔가 단단한 교육을 시키려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건 학교 측에서의 소극적인 방법일 뿐,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우리한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학교 측에 전학을 간다고 처리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당황스러운 건 학교의 규칙상 withdrawal 신청 기간이 지났으므로 나는 위약금을 내야 한다고 얘기해서 마치 우리를 두 번 절망에 빠뜨리는 일을 겪게 되었다.


기가 막혔다.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전학 가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고, 그냥 아이들을 주의시키겠다, 해당 아이들은 따로 만나서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면 끝인 건가? 심지어 학교에서 벌어진 일로 인한 피해로 학교를 나가겠다는데 돈을 받고 나가는 게 아니라, 돈을 내고 나가라고? 심지어 withdrawal의 금액은 장난이 아니었다. 천만 원이 넘는 돈이었다. 아이는 갈팡질팡하고 있었고, 나는 아이의 환경을 싹 바꾸는 게 이 시기에 필요할 것 같아서 전학을 원했고, 남편은 아이들이 괘씸하기도 하지만, 그냥 이곳에서 적응하며 잘 다니는 것도 아이가 배우는 것이 있을 거라고 내심 마음을 내보였다. 이게 공립학교였다면, 그냥 그럴 수도 있었고, 계속 이곳에 머무를 거라면 남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곳에 잠시 머물기 위해 떠날 날을 알고 학교를 보내는 사람들이고, 이 영악한 아이들이 사각지대에서는 또다시 그러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었다. 그중에 떠날 친구들도 있었지만, 예전에 내가 한 번 환경을 바꾸어주고 싶었던 때와 같은 이유로 전학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중대한 일인 만큼 수차례 대화를 통해서 전학을 하기로 결정했고, 이제 남은 건 천만 원이 넘는 어이없는 withdrawal을 처리하는 문제였다. 학교 측에 아무리 메일을 보내도 그 일은 안타깝지만 규칙은 규칙이라는 점에,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곳을 찾아냈고, 2차 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구구절절 그리고 상세하게, 나라와 도시, 학교명, 발생한 사건과 학교 측에서의 행동 및 내가 입은 피해 상황을 적었고, 담당 비서는 메일을 전달해 주겠다고 답변이 왔다.


그렇게 몇 차례 메일이 오고 갈 때까지만 해도 그들이 강 건너 불구경하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내 핸드폰의 아이들의 캡처본 사실이 그곳에 전송되면서부터, 또한 국제학교에 보내는 아시안맘으로서 느끼고 체험한 나의 적나라하고 생생한 사건의 경위들이 오고 가며, 그제야 이 사태가 커질 수 있다는 걸 감지했는지 학교 측과 협상을 시작했다. 나는 학교에서도 자기가 이 사건에 대한 결정을 할 수도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된다 안 된다를 평가하며, 시간을 끄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고, 도와주려는 듯하면서도 뒤로 쏙 빠지고 싶어 하는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도 보며, 직접 헤드 교장한테 이메일을 보냈다. 이 사건에 대해서 보고 받은 게 있는지. 지금 어디까지 진행이 되었고,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처음에 헤드 교장은 사건 파악이 잘 되지 않아서, 자꾸 딴소리를 했고, 이에 학교 측과 조율이 가능한 기관과 삼자로 이메일을 보내며, 헤드 교장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정정해 주며 점점 기운이 빠지고, 많이 힘들었다. 헤드 교장 역시, 처음부터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학교 측에서 신경을 쓰겠지만, Wirhdrawl은 규칙이라 이와는 다른 이야기라며 100%를 납부해야 전학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했다. 당시에 미치고 팔짝 뛴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이 이렇구나를 하루하루 느끼며 살았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을 식히기 위해 차가운 맨바닥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멍했던 시간들이 많았다. 유색인종으로 사는 아시안들의 삶은 참 고달프구나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던 순간이다.


나의 애절함이 통했는지 아니면, 이 아시안 엄마가 무슨 일이라도 낼 거라고 생각했는지, 결국 조율 기관 측에서도 학교 측에 withdrawal의 디스카운트를 제시했고, 이제는 얼마를 깎아줄지에 대한 논의만 남겨놓은 채 계속 이메일을 주고받았고, 성격 급한 나는 이메일로 이야기하지 말고, 학교를 찾아가겠다고 헤드 교장한테 직접 만나자고 이메일을 보냈다. 당시에 코로나 기간이라서 헤드 교장은 만날 수는 없으니, 화상으로 미팅을 하자고 제안했고,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통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사전에 내게 이미, 자신은 그 자리에 일이 있어서 못 간다고 알렸던 사람이고, 처음부터 요청할 생각도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과 해결하는 게 더 효율성 있고, 일이 매끄럽다는 걸 여러 번의 통화에서 느꼈기 때문이다.



화상 미팅 당일날, 우리 부부는 헤드 교장과 대면을 했고, 당시 내 스마트 워치의 맥박은 긴장도가 폭발이라 계속 140 이상을 유지하고 있었고, 당시에 내 신체는 화병의 최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처음 화상으로 대면한 헤드 교장과, 통역이라고 앉아있는 사람과, 몇몇 사람들이 있었고, 통역은 그다지 도움 되지 않아서 그냥 내가 하겠다고 했다. 사람이 분하고 억울함이 차오르면 없던 에너지도 생기고 겁이 상실된다. 그냥 이 일을 제대로 처리해서 얼른 훌훌 털어버리고 새 출발을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 들지 않았다. 화상 통화를 하기 전에 남편과 나는 학교에서 50%라도 해주면, 그냥 그거라도 내고 옮기자고 결정을 했었고, 더듬거리며 나의 상황을 전달하며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가 오고 갔다.


헤드 교장은 우리에게 우리가 생각한 퍼센트 이상으로 withdrawal 디스카운트를 제안했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바로 수락하고, 한 달에 걸친 긴 싸움과 대장정이 마무리를 짓는 시간이 되었다. 아마 속으로는 "저 아시아 엄마 되게 진상이다."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withdrawal 비용의 해결로 전학을 갈 수 있다는 게 확정이 되자, 마음 여린 아이는 이때부터 단단해지고 강해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자신이 불합리한걸 혼자 헤쳐나갔지만, 이런 사실들을 공개하는 순간, 뭔가 자기도 같이 피해를 볼까 봐 그랬는지 쉬쉬했지만, 이 일이 학교에서 수면 위로 떠오르고, 결국 큰 피해를 보지 않고 일이 해결이 되자, 스스로 그 친구들과 연락을 끊어버렸다. 물론, 눈치 없는 주동자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내게 위챗을 보내서, "이 친구와 연락이 안 되는데, 위챗을 확인하라고 전해주세요." 이런 톡을 몇 번 보내기도 하고, 속이 없는 건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다행히 그중 한 친구는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반성하고, 아이에게 꾸준히 연락을 하며 "정말 미안하다, 답을 해줘라,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한 걸 알고 바로 잡고 싶다" 등의 메시지를 보냈고, 답을 하지 않던 아이는 한참 뒤에 사과에도 시간이 있는 거라며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했다. 그 친구는 계속 재미있는 영상을 보여주기도 하고, 자신과 더 이상 친구를 해도 되지 않으니 잘못된 행동과 실수를 바로 잡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여기에서 아들이 그래도 마음을 다시 열고, 받아줄 줄 알았는데 아이에게도 상처를 회복할 시간은 꽤 길게 필요했다.

Ⓒ Mollie's son
Ⓒ Mollie's son


우리는 그렇게 정든 그곳을 떠나서 새 환경에 다시 정착했고, 익숙했던 물에서의 작은 사회관계를 떠나, 낯설지만 새 도전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을 기회로 삼아 빠르게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내향적이지만 낯가림은 많이 없는 아이는 어린 시절에 인생의 쓴 맛을 크게 보고 실패를 잘 극복하는 과정을 배울 수 있기도 했다. 해외살이는 정말 만만치 않고, 이런 예상치 않은 예측불가의 상황이 여기저기서 뻥뻥 터질 때마다 부모 또한 점점 대담해지고, 대범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같다. 낯가림 많고 긴장 잘하는 내가 처리했을 일이라고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 그날의 기억들이다.


차별로 인해서 아픔을 겪었고, 과거의 상처가 되어 어딘가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는 있지만, 실패의 경험은 성공과 도전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층간 소음으로부터 한인타운을 떠났지만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서 만족하는 삶을 사는 것처럼, 아이 역시 잊지 못할 상처와 억울하고 분한 일을 겪었지만, 지금 지나고 보면 그 일을 통해서 아이는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러한 좁은 식견의 외국인 친구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새롭게 겪게 되었다. 지금은 오히려 그 친구들에게 감사하다. 그 친구들이 아니었으면, 좋은 시절 속에서 행복하게만 누리고 갔겠지만, 이 일을 통해서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또 우리 가족에게 없을수도 있었던 새로운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해주기도 했다.


대신 뭐든 일처리는 공과 사를 분명히 하되, 내가 주장하는 바는 확실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는 점도 배우게 되었다. 불쾌하고, 불편하고, 언짢으면 숨기지 말고, 당당히 드러내서 맞서야 한다는 걸 톡톡히 느낀 우리 가족에게는 인생의 큰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사진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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