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코로나는 아시안 탓이 아니란다.
중국, 한국의 바로 옆에 위치한 나라, 아시아에 살고 있지만, 아이는 국제학교를 다니다 보니 여러 인종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그 안에서 우리와는 다른 사람을 대하는 법을 보며, 경우에 따라서는 '차별'이라고도 느낄 수 있는 '파란 눈'의 웃지 않는 차가운 눈초리를 느끼기도 했고, 반면 어색함을 깨기 위해 내가 괜히 더 웃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큰 키와 뚜렷한 자기주장이 섞인 직설적인 화법은 괜히 나 자신을 움츠려 들게도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어느 집단이나 무리에서는 경제력, 부모의 직업, 아이의 성적, 지역색 등에 따라서 여러 목소리가 있듯이, 나고 자란 문화가 다르고, 피부색부터 머리카락 색까지 다른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서로 다르다고 느끼는 이질감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점점 나도 그런 모습에 무뎌지기 시작했다. 내가 영어를 유창하게 잘하는 것도 아니니, 적당히 필요한 순간에만 의사를 밝히면 됐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터진 코로나로 인해서 전 세계가 팬데믹에 빠지고,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인생에서도 이 정도로 한 나라로 인해서 지구촌 곳곳에서 아파하는 모습과 피해가 속출하고, 원망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이는 점점 아시안 혐오로 발전하여, 같은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최근 몇 년간 아시안 차별이 급증했다. 한국 사람인 나 역시, 중국에 살지만 하루빨리 중국을 떠날 날을 꿈꾸며, 그동안 겪어왔던 통제와 한심함이 숨 막혔는데, 원래도 보이지 않던 곳에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느끼는 외국인들은 아시안을 싸잡아서 같은 무리로 봤을 거란 생각이 든다.
코로나로 온라인 수업은 몇 달씩 지속되었다. 코로나가 잦아들면 잠시 학교를 갔다가, 또다시 어느 동네에서 심해졌다고 통제가 시작되면, 갑자기 학교는 문을 닫는다는 메일을 보내고 온라인 수업으로 돌리는 날이 계속되었다. 온라인 수업이 만성화되자, 짓궂은 아이들은 플랫폼을 사용하여 수업 중에 자기들끼리 챗방을 만들어서 장난을 치기 시작했고, 서로 얼굴을 공개해 놓고 수업을 듣는 아이의 얼굴 중 순간적으로 웃기게 나오는 사진을 캡처하여 돌리는 등 갖은 유치한 장난을 하는 모습을 보곤 했다. 그때까지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학교에 가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배우고 놀아야 할 아이들이 얼마나 따분하고 지루하면 이런 행동을 할까라고만 생각했다.
기존에 친하던 친구들이 주재원 시기가 끝날 무렵에 각자 자기 나라로 떠나고, 그때 한번 학교를 옮길까 하다가 아이는 옮길 의사가 없어서 아이의 뜻을 존중했고, 남아있는 아이들끼리 또 친한 그룹이 되어 학교 생활을 잘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뿐만 아니라, 회사도 문을 닫아서 재택근무로 전환되어 남편 역시 집에서 근무를 하게 된 날이었다. 평상시에 아들의 학교 생활을 잘 볼 수 없던 아빠는 때는 이때 다하고 흐뭇하게 아들의 온라인 수업을 바라보며, 나보다 더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다. 아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남편은 아이의 전자기기 화면에서 순간 얼음이 되어 멈칫할 정도로 충격적인 메시지들을 보았다. 그리고 다급히 나를 불렀다.
이리 와봐! 이거 뭐야? 읽어봐 봐. 이게 무슨 내용이야? 이거 얘 친구들 맞아?
뭔데?? 어?? 이게 무슨 내용이야. 얘네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우리는 아들도 당장 호출하여 챗 내용을 같이 확인하며 점점 과거 챗 히스토리까지 거슬러 올라갔고, 읽으면 읽을수록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지금 다시 읽어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내용들로 가득 찬 내용들을 일일이 캡처하며 폴더에 담기 시작했다. 이중에는 남편이 평소에 좋아하지 않는 아이가 포함되어 있었고, 사실 그 아이가 주동자나 마찬가지였다. 그 아이의 엄마 역시 예전에 처음 만났을 때 대뜸 처음 묻는 질문이, "한국? 너희 나라 인구는 어떻게 되니?"가 질문이어서, 숫자를 영어로 몰라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코로나가 시작된 중국을 시작으로 중국을 비판했고, 그에 앞서 현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을 언급하며 대한민국과 북한을 동급 취급하며, 갖은 조롱과 비난을 일삼았다. 당시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한참 전쟁도 하던 시기라서, 나라 대 나라의 싸움이 편협한 아이들의 일개 말장난과 분열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심지어 한 아이는 중국 정부에서 알면 놀랄 통치자의 이름을 넣어서 가짜 편지를 만들어 내어서, 놀리기도 하고, 상당히 저질적으로 아시안을 배척하고 있었다.
아이가 한국 연필을 쓰고 있는 게 온라인에 잡히면, 그거 한국 연필이 아니라 북한 연필 아니냐고 시비를 걸고, 쉴 새 없이 계속되는 딴지에 아이는 계속 몇 달째 방어를 하며, 자기 할 말은 다 하고 있었지만, 무리로 편을 먹고 덤벼드는 애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아이가 그만 놀려라, 순진하게 사진을 찍어서, 한국 연필이라고 사진을 보내면 그 화나는 모습을 가지고 가스라이팅을 시작했다. 그래도 한 동안 친해진 친구들이라고 놀고 했던 우정이 있었기에 아이도 차마 그 그룹에서 나오지 못했고, 소극적인 항변을 계속하며 속은 있는 대로 썩었겠지만, 우리한테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다는 게 더 속상하고 참을 수 없었다. 코로나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몫이었다.
눈물이 쏟아져 나왔고, 아이한테 자초지종을 물었지만, 누구와도 싸워본 적이 없는 아들은 이 일로 인해서 자기가 오히려 학교에서 무슨 일을 당하는 게 아닐지,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잘못되는 건 아닐지, 그걸 먼저 걱정하고 있었다. 차분하고, 성실하고, 공부와 더불어 나름 자기가 좋아하는 활동들로 선생님들한테도 인정을 받고 있던 아이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다른 성향과 어울리며 혼자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잘 들어. 이건 네 잘못이 아냐. 어떠한 경우에도 이렇게 대놓고 사람을 차별하고 놀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심지어 이건 수업 시간에 일어난 일이야. 이렇게 몇 달을 당해놓고 말을 안 한 건 잘못된 거야. 너에게 그 누구도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어. 마음 굳게 먹어.
나는 당장 학교에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당장 이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담당자, 즉 교장을 만나고 싶다고 오열하며 이야기했다. 그날 더 웃긴 건, 그분의 대답이었다. 공감과 잘못된 위로란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이보다 더 심한 일도 있지 않나요?
바쁘다는 일정 핑계로 미팅을 며칠 뒤로 미루려고 하자, 나는 당장 오늘 또는 내일 간다고 통보를 했고, 하루 전날 번역기를 통해서 내 모든 마음을 담아서 영어로 쓰고 외우고 또 외워서 연습했다. 채팅의 캡처본도 종류에 따라서 인종차별, 놀림, 성희롱의 폴더로 분류해서 다 오픈할 생각이었다. 아는 엄마들도 많지도 않았지만, 친한 지인에게도 이야기하지도 않았고, 이야기할 필요성도 없었다. 앞에서는 걱정을 하겠지만 그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말이나 실어 나르지 않으면 모를까. 실제로 학교에서 일어나는 다툼, 싸움 등을 혼자 해결하지 않고 주변에 퍼트리다 보면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이야기가 내 귀에 들어올 때도 있다.
학교는 그야말로 비상이었다. 약속된 시간에 미리 기다리고 앉아있자, Assist Principle 이외에 학년을 책임지는 대표 선생님과 총 3명이 상담실로 들어오셨고, Adimission 담당자도 왔다. 나는 패드를 열어젖히며, 연습한 대로 이야기했다. 반 울먹거리느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 상황의 무거운 분위기만 감지할 뿐.
이 패드의 내용을 다 확인해 봐라. 국제학교에서 이런 인종차별이 일어나는 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업 시간에 일어난 일이다.
나의 자료들을 보고 일동 침묵하며 얼굴이 상당히 굳어졌다. 그리고 급히 ICT 컴퓨터 담당자를 불러서 자기들끼리 모여서 뭐라고 이야기하며, 의논하기 시작했다. 학년 대표 선생님은 평상시에도 온화하게 이메일을 주고받았고, 처음 얼굴을 대면하는 자리였는데 진심으로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며 이것은 학교에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며 대책을 세워서 잘 처리하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중국인인 Adimission 담당자도 서열의 기에 눌려서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내게 다가와서 자료 좀 볼 수 있냐고 물었고, 중국의 최고 권위자를 포함한 가짜 편지와 자신의 나라인 중국을 욕하는 모습들, 또 어린아이들이 하는 이야기치고는 악의성이 다분해서 많이 놀라는 눈치였다. 다들 급히 어디론가 연락하고, 뭔가를 지시하고, 내게 알려줘서 고맙다며 학교 측에서 최대한 일처리를 하겠다고 기다려달라고 이야기했고, 그때부터 내가 원한 건 하나였다. 이곳을 뜨는 것. 하지만 절차상 규정상 또 쉽지 않았고 나는 포기하지 않고 들이댔으며, 그때 코로나 통제와 더해진 이미 터져버린 일처리에 나의 몸상태는 최악으로 치닫았다. 불면, 자다가 놀람, 빈맥 등 이미 중국 초기 생활에 한번 생긴 병은 스트레스 상황만 되면 나타났고, 증상은 가장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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