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옷을 벗게 되면?
해외 주재원 와이프는 근무지만 바뀌었을 뿐인데, 마치 '명품옷'을 입는 느낌이다. 옷 속의 나는 같은 사람이지만, 그 옷을 입고 있을 때는 왠지 더 대접받는 느낌이 든다. 평소 돈 씀씀이도, 아이의 교육도, 한국에서보다 사치스러운 느낌이 있다. 남편이 주재원 발령을 받아서 해외 근무를 하게 되면, 동반가족을 포함해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5년 전, 주재원 생활이 뭔지도 모르고 갑자기 중국으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며, 갓 이사 온 우리에게 청천벽력 같은 결정이 내려졌고, 아이는 전학 1년 만에 다시, 나라를 바꾸어서 두 번째 전학을 해야 했다. 앞이 막막하고, 결정이 되었어도 날짜가 나오지 않아서 마음을 졸이며 준비를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6년이 되어가고... 물론, 절반인 3년을 코로나 통제로 3년을 안타깝고 아까운 시간들로 꽉 채우긴 했지만, 어느덧 주재원 와이프 생활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의 학업 이수를 위해 회사 측에서 학년이 끝나는 시점까지 비자 연장을 받고, 귀국 정리를 시작했다. 우리보다 3개월 먼저 한국에 귀국할 남편이 있을 동안까지는 당시 살던 집에서 연장을 해주었지만, 그 후 3개월 동안 살집은 온전히 자비로 해결해야 했다.
그런데 주재원이 끝나고 '주재원 와이프'라는 명품옷을 벗고 나니, 하루아침에 다시 예전의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우리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회사의 지원을 받아서 집을 구할 때는 지원금이라는 일정 금액 내에서 돈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환경과 집상태를 따져가며 자유롭게 집을 구할 수 있었고, 국제학교도 어느 정도 자비 부담은 있었지만, 큰 걱정 없이 마음껏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와 둘이 살 집을 위해서는 집의 컨디션보다는 가격부터 눈에 들어오는 게 현실이었다. 가격의 마지노선을 정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컨디션은 애써 눈감고 '3개월만 살 건데 뭘.' 이렇게 눈을 한껏 낮추게 되었다. 가격을 낮추니 클럽하우스가 있는 센터가 아니라, 인적이 드문 외진 위치를 찾게 되고, 가전이나 가구의 수와 퀄리티보다 빈집을 고르게 되었다. 아빠 없이 지내야 하니, 가격을 보면서도 너무 저렴하면 안전이 걱정되고, 그 안에서 적당한 집을 고민하게 되는 모습에 무심코 씁쓸한 웃음이 났다.
귀국 후 돌아갈 학교를 정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현재와 비슷한 수준의 학교로 가려니 회사원 월급으로 만만치 않은 비용으로 다른 방법을 고민하게 되고, 중국의 국제학교로 눈만 높아진, 경제적인 부분이 가장 큰 걱정거리가 되는 그냥 평범한 직장인의 가족으로 다시 돌아간다.
주부로서의 생활은 나는 그나마 Ayi라는 도우미를 쓰거나 골프, 쇼핑 등을 많이 하지 않아서 한국 식료품이나 자잘한 살림 쇼핑 말고는 불필요한 지출은 나름대로 많이 없다고 생각했고, 돈을 어느 정도 저축했다고 생각했지만, 귀국하며 나가는 돈을 보니 '벌 때 좀 더 모아둘걸.'하고 후회가 많이 되기도 했다. 마음먹고 돈을 저축하면 목돈을 모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단, 인건비가 저렴한 중국에서 나름 여유롭게, 또 즐기며 지냈다면 돌아갈 때의 아쉬움은 정말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 역시 중국에서 일하면서 갖은 고생을 다하고 힘든 일도 많이 겪어서 늙기도 늙고, 머리도 많이 빠졌지만, 막상 주재원 생활이 끝나가니 아쉬움도 크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게 느껴졌던 시간들이 또 금방 지나간다며, 이미 귀임한 동료들도 다들 다시 나오고 싶어 한다고, 본인도 마음이 싱숭생숭해했다. 나 역시도 한국을 제외하고 이렇게 장시간 산 곳은 이곳이 처음이라 중국의 내가 살던 동네를 생각하면 약간 제2의 고향 느낌이기도 하다. 그만큼 정들고, 우리의 추억들이 길가 곳곳에 묻어있는 그곳.
내가 처음 주재원 와이프라는 옷을 입고 이곳에 왔을 때, 참 불편하게 여겨졌던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다. 텃새, 비교, 특권 의식, 갑질, 벼슬,,, 주재원 와이프는 잠시 어쩌면 내게 맞지 않는 값비싼 옷을 입고 즐기다가 그 옷을 벗는 순간,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그냥 '나 자신 그대로일 뿐이다. 대신 독립적이고 강한 멘털을 얻을 수 있는 배움의 시간이기도 했다. 예측불가한 상황 속에서 늘 언제 돌아가야 할지 불안에 떨어야 했고, 아파도 제대로 치료를 못 받을 때, 갑자기 집 지원금이 줄어드는 일도 생겼을 때, 잠시 차량이 없기도 하는 등 나열할 수 없는 수많은 해프닝이 가득한 해외살이를 통해서 좀 더 나를 찾고, 내면이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값진 시간이기도 했다.
주재원 가족시절에는 회사를 방패 삼아 든든하고 두꺼운 명품 옷을 입고 있지만, 점점 싱그러웠던 풀잎들이 추위에 말라가듯이 봄, 여름이 되면 우리 옷들도 얇아지고 주재원 가족이라는 명품 옷도 점점 닳아서 곧 벗을 날을 아쉬워하던 그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또, 그립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시절들이.
언젠가 또 주재원 와이프라는 브랜드의 명품 옷을 입을 기회가 있을까?
마지막까지 '말 안 듣는 주재원 와이프'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많은 내향형 주재원 와이프들 , 그리고 주재원 생활 동안 비슷한 문제들로 고민했던, 고민하는, 고민할 주재원 와이프분들께 나의 이야기가 조금은 힘이 되고 공감을 얻고, 그들의 답답함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작은 소통 창구가 되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는 다시 살아도 말 안 듣는 주재원 와이프로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