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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llie 몰리 Sep 19. 2024

드디어 귀임계획서가 나왔다. 그런데,,,

귀임 준비도 혼란스러운데 재발령 이야기도 솔솔

매년, 최소한 1-2년마다 갑작스러운 귀임 이야기로 애간장을 녹이던 주재원 생활 6년 차에 접어들며, 드디어 귀임계획서가 나오게 되었다. 남편이 위챗으로 내게 보내준 xxxxxx.pdf 파일에는 귀임자인 남편의 인적사항, 귀임부서 확정사항, 계획 일정, 인수인계, 출국일, 귀임 휴가, 귀임 후 출근 시작일 등 구체적인 계획이 모두 적혀 있었다. 


"언제쯤 한국에 들어갈 거야"라고 뜬구름처럼 이야기만 들어서 실감을 못하고 있다가, 귀임계획서를 보니 이제 현실로 와닿는 순간이었다. 만감이 교차하고, 중국 생활에 무료함을 느낄 때쯤 그렇게 기다리던 귀임계획서인데 막상 날짜가 정해지니 심란했다.


나와 아들은 학기 종료를 위해 6월 말까지 베이징에 둘이 머물기로 했고, 남편은 우리보다 3개월 먼저인, 4월 초에 귀임을 하게 되었다. 가족이 같이 들어갈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미 회사 규정의 최대 5년의 주재원 가능 기간 + 1년, 총 6년의 주재원 생활을 하고 가는 거라, 더 이상의 연장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부모의 주재원 발령으로 자연스럽게 국제학교 경험을 한 친구들의 메리트 중의 하나는 한국의 대학 입시에서 특례 자격으로 한국의 대학 입시를 치를 수 있지만, 아이는 6년 간의 국제학교 생활을 마쳐도 특례에 해당되지 않았다. 그래서 잘 모르기도 했지만, 처음부터 특례에 관심도 없었고, 엄마들 모임에서의 화두였던 특례, 교육, 학원 정보, 입시 이야기에 내겐 무의미했다. 국제학교 생활에 푹 빠져있던 아이였고, 아이의 성향에도 잘 맞았던 교육시스템을 이어가기 위해서 혼자 인터넷으로 서치하고 아날로그식으로 전화 상담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우리 가족만의 대형 프로젝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예정해 놓은 일들은 감감무소식이었고, 스케줄을 예측할 수 없는 일이라서 계속되는 불확실한 미래는 계속 진행되었다.


그냥 순리에 맞게 물 흐르는 대로 당장 앞에 닥친 일을 하나하나 해결하면서, 나 역시도 남은 베이징 생활을 정리하고, 그 순간에 해야 할 구체적인 무언가를 해야 할 뿐이었다. 원래 12월 말에 살던 집 계약이 종료인데, 집주인이 남편이 귀임하는 3월 말까지는 연장을 해줘서 문제가 없었지만, 그 이후의 3개월은 이제는 주재원 신분이 아닌, 개인의 신분으로 자비로 집을 구해야겠다. 


TV, TV장, 소파, 식탁, 침대 등의 큰 짐도 정리하고, 회사에서 정해준 업체 중에서 해외 이사 업체를 골라야 했으며, 아이와 나만 남겨질 남은 베이징 생활을 위한 아파트를 보러 다니고, 밤에 피난민처럼 이삿짐을 나르기도 했다. 가장 시간 투자가 많이 소요될 부분은 아이의 다음 학교 문제였다. 알 수 없는 대형 프로젝트의 일정을 기다리는 중에도 아이는 귀국 후에 어딘가는 학교를 입학해야 했다. 아이는 본인이 원하는 바를 지속적으로 이야기했지만, 내가, 그리고 남편이 준비하고 결정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국 우리는 무리수를 두어서 대형 프로젝트는 별개로 하고, 또 다른 지출을 감수하고라도 얼마 남지 않은 아이의 학교 생활을 최대한 서포트해 주기로 결정을 했고, 이 정보력 없는 집순이 엄마는 아이가 학교에 등교를 하는 시점부터 하교를 할 때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전화통을 붙잡고 정보를 수집하고, 하나하나 배워가며 엄마로서의 귀임 준비에 한창이었다. 그렇게 2가지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던 차에 귀임 직전에 남편이 슬쩍 입을 여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희소식, 어떻게 보면 말문이 턱 막히는 제안이었다. 마지막 출장지에서 돌아온 남편은 뜬금없이 내게 "중국에 더 사는 거 어때?"라고 물었고, 이 지긋지긋한 주재원의 운명을 감지한 채 되물었다. "귀국 준비하래서 작년부터 하고 있는데, 불과 몇 달 남겨놓고 갑자기 또 무슨 얘기야?"


중국 타 지역에서 새로운 프로젝트가 생겼고, 주재 기간이 끝나가는 남편한테 그쪽에서 몇 년 다시 맡아서 근무를 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이 온 것이었다. 내 머릿속은 혼비백산 그 자체였다. 남편의 말에 나는 단칼에 "싫어! 중국에서 사는 건 더 이상 싫어!"라고 했지만, 고민됐던 한 가지 이유는 아들의 학교였다.


남편이 베이징 근무가 끝나는 시점에 바로 그 지역으로 가고, 새로 국제학교 지원 과정을 거쳐서 우리는 학기가 끝나는 대로 합류하면, 아이는 국제학교를 졸업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일반 회사원 가정에서 회사의 도움으로 아이가 국제학교를 졸업할 수 있는 점은 우리가 생각하는 2번째 주재원의 장점인 것 같다. 아무런 걱정 없이 국제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원의 능력으로 아이한테 해줄 수 있는 최선을 다해주는 것 같았다. 


이렇게 우리의 인생 계획의 주도권은 회사가 가지고 있었기에, 이러다가 그 이후에 또 다른 지역으로 보내지고, 결국은 중국에서 은퇴하는 거 아니냐고 농담으로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이미 벌려놓은 대형 프로젝트도 당시에 답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답도 없고, 어떠한 보장도 없었다. 이 기회를 놓쳤다가 우리의 계획도 무산되어 버리면 그때 아들의 교육은 어떻게 될지, 좋기도 하고 고민되기도 하는 등 매 순간의 선택이 어려운 나날들이었다. 귀임 준비를 하며,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들 속에서 중국에 온 이후로 두 번째로 많이 늙고 지치고 감정 변화가 심한 시기였다. 


우리가 벌려놓은 답 없는 프로젝트, 아이의 학교 지원 결과는 무기한 대기 중, 한국 집 계약 문제, 이사 날짜와 동시에 한국 학교까지 동시에 알아봐야 하는 이 상황이 많이 힘들었다. 어느 것을 선택하던지 우리가 한 선택에 대한 책임을 감수해야 했다. 결국 우리는 타 지역 발령 제안을 과감히 거절하고, 일단 한국행을 선택했다. 남편은 그렇게 혼자 3개월의 한국 살이를 시작했고, 나와 아이는 중국에 남겨져 베이징 생활을 둘이 마무리하게 되었다.


대문사진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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