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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llie 몰리 Sep 21. 2024

주재원 마무리, 두 집 살림은 힘들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남편은 지금까지 회사 생활 동안 수많은 장기출장을 다녔다. 그래서 어느 정도 떨어져 사는 건 꽤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예 따로 거주지를 정해놓고 두 집 살림을 하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단 3개월이었지만, 사는 내내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3개월 동안에 벌어진 일들은 내가 잠시라도 한눈팔 새가 없게 만드는 일 투성이었다.


일단 한국으로 돌아간 남편 역시 한국에서의 집계약 시점과 맞지 않아서 혼자 캐리어를 들고 바깥 생활을 2주 정도 하며 출근을 했다. 차도 없어서 회사 근처에 저렴한 잠만 자고 나올 수 있는 적당한 곳을 정했고, 주말에는 차를 렌트해서 볼 일을 보러 다녔다. 집계약 문제로 일처리가 원활하지 않는 부분이 많아서, 나는 중국에서 마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듯,  남편과 여러 한국 업체들 사이에서 중간자 역할을 하며 전화통에 불이 났고, 우리가 들어갈 집의 도배, 입주 청소와 더불어 TV, 세탁기, 냉장고, 옷장, 식탁, 책상 등 대부분의 가구와 가전을 모두 새로 구입해야 했다.


남편과 서로 나누어서 물건을 고르는데도 한참, 결제하고, 물건을 받기까지, 하루에도 결정해야 할 문제들이 겹겹이 쌓여있었고, 남편도 출근과 동시에 아내의 부재 역할까지 도맡아야 해서 둘 다 동시에 힘든 시간을 보냈다. 나는 아이 케어를 하며, 중국에서 터지는 문제들을  또 해결하고, 혼자 귀국 준비를 동시에 해나갔다. 성적표와 재학증명서 등 귀국 서류 준비와 우리에게 맞부닥친 2가지 일까지 동시에 터져서 중국에 주재원으로 들어올 때보다 몇 배는 더 머리 아픈 시간들을 보내게 되었다.


나 역시 남편의 한국일과 동시에, 중국에서 잠깐 살게 된 집과 관련한 여러 문제들을 혼자 처리하고, 아이의 학교 일정을 챙김, 또 귀국과 관련한 예상 못했던 여러 스케줄을 헤쳐나가며, 그 속에 파묻혀서 최대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 와중에 감기 몸살도 심하게 와서 약 없이 2주를 꼬박 앓아가며 버티기도 했고, 스트레스로 심장이 두근대는 증상이 또 생기기도 했다.

© Mollie



먼저, 아이와 둘이 남아있는 기간에 외국인 학교의 발표 기간이 있었고, 아이가 외국인 학교에 합격하게 되었다. 귀국 준비를 하며 가장 결정하기 어렵고 고민스러웠던 부분은 바로 아이의 학교 문제였다. 국제학교는 아이의 선택이 아니었지만, 훌쩍 커버린 아이의 다음 학교는 아이의 선택에 맡겨지게 되었다. 여러 방법 중에 일단 외국인 학교의 입학 조건을 충족한 아이는 서울, 경기의 인가 외국인학교 및 국제학교 몇 곳에 일찌감치 지원을 했고, 인터뷰를 진행했었다. 학교 성적과 Map test의 점수가 인정되어 또 다른 시험은 불필요했지만, 좁고 좁은 내국인 전형에 입학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입학 상담 당시에도, 늘 내국인 자녀의 티오는 0이라는 말을 들었고, 지원을 해봐야 알 수 있는 결과였다.


입학금도 저렴하지 않았고, 지원을 한다고 해도 결과는 보통 3, 4월에 나오니, 그 결과에 따라서 다시 한국 학교를 갈지, 아니면 유학이라도 가야 할지, 또는 기러기를 해야 할지 고민을 해야 하는 그 상황은 정상적인 귀국 준비와 동시에 진행되어야 했기에,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스트레스가 되었다. 지인도, 정보통도 없는 집순이 엄마는 모든 정보는 학교 입학 상담처와의 전화 통화와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아는 정보가 전부였지만, 일단 넣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입학 과정에서 현재 학교에서 받아야 하는 입학 관련 서류를 떼는 것도 족히 한 달은 매달려야 했고, 각 학교마다 서로 다른 지원서류 제출 및 원하는 양식이 달라서 엄마의 역할이 꽤 컸다.


지원하고 5개월이 지나서 3, 4월에 하나둘씩 발표 결과가 나왔고, 아이는 운이 좋게 3군데의 외국인학교와 국제학교에서 입학 허가 메일을 받게 되었다. 얼마 남지 않은 아이의 학창 시절이기에, 지금처럼 사교육 없이 중국에서 생활하던 대로 학교만 겨우 보낼 생각이었다. 예상보다 좋은 입학 결과와 나름 유명한 곳들이었기에, 그중에서 가장 가고 싶은 한 곳에 입학 결정 메일을 보냈고, 돌려받지 못할 Non-refundable deposit과 입학금을 내고, 스쿨버스도 신청을 완료했다. 이와 동시에 한국에서 남편에게 오는 여러 연락들, 골칫거리들을 동시에 해결하는 것까지 당시에 많이 벅찬 일이었다.

"그래, 그래도 아이가 원하던 교육을 받을 수 있고,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다행이다."라고 생각하기엔 이르렀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합격이 된 지 며칠 안 되어, 이번에는 이민국에서 메일을 받게 되었다. "인터뷰가 잡혔으니, 신체검사를 하고, 언제 몇 월 며칠에 인터뷰를 보러 오세요." 우리의 큰 프로젝트는 바로 이민이었다. 이 또한 회사를 끼고 가는 게 아닌 정말 맨땅에 헤딩인 이민이라는 큰 숙제를 안은 채, 앞 날을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안개 낀 망망대해를 떠도는 느낌으로 몇 년을 살아왔다.


큰일이다. 갑자기 아이 학교에 이야기를 하고, 학교를 빠지고, 한국에 다녀와야 했다. 아이는 고등학생이라 출석 날짜 제재가 있었기에 날짜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밤비행기를 타고, 새벽 비행기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것도 2주일 간격으로 두 번이나. 그나마 거리가 가까우니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모든 게 처음이라, 학교와 이메일을 통해 연락하며 이게 맞는지 의문을 품은 채 일을 진행했고, 또 갑작스러운 한국 방문과 모든 게 동시다발적으로 터져서 흘러가는 이 상황은 참으로 암담했다. 물론, 아이도 외국인학교에 입학 허가를 받고, 대사관에서 인터뷰 일자도 나오는 등 모두 바라는 대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는 했지만, 또 선택의 갈림길에 서야 했다.


'외국인 학교는 어떡하지? 이제 막 새로 산 가전, 가구는 어떻게 하지?' 이제 정착하려고 들어왔는데, 또다시 나가게 되는 이 상황에 머리가 많이 아팠다. 또 이 기다리던 인터뷰에 응해야 하는 게 맞는지도 헷갈렸다. 외국인학교를 정했던 이유도 인터뷰 시기를 대충 내년 정도로 예상을 해서 한국에서 어느 정도 살다가 갈 걸 예상했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게 일정들이 남편이 귀국하고, 홀로 중국에 남겨진 3개월 만에 일어나게 되었다. 떨어져사는 걸 아쉬워하며, 1달에 한 번은 우리를 보기 위해 중국을 오겠다던 남편은, 우리가 갑자기 한국에 두 번이나 들어가게 되는 바람에 중국에는 더 이상 발을 들이지 못했고, 나와 아들은 둘이 중국 생활을 정리하고 마무리한 채 캐리어들과 함께 한국에 귀국하게 되었다.


굿바이, 중국, 베이징.

© Mollie


 대문 사진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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