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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llie 몰리 Nov 11. 2024

그렇게 그날, 미국 영주권을 받아버렸다.

You're all set, 그때는 몰랐지.

주한 미국대사관 안에 엄숙함이 흐른다. 모든 인터뷰 대기자들의 손에는 두꺼운 서류뭉치들이 있고, 순서에 따라 지문을 찍고 접수를 하고 자신의 번호가 불리기를 대기한다.


갑작스러운 이민 비자 신체검사와 비자 인터뷰를 위해 아이와 나는 전날 밤 비행기를 타고 중국에서 한국으로 급히 들어왔고, 우리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몇 년을 기다린 이 순간이 마치 인생 최고의 날이 되기라도 하는 듯, 전날 시켜놓은 주문한 설렁탕을 한 그릇씩 먹고 서둘러 일찌감치 출발했다.


결국 인터뷰 시간보다 2시간 전에 도착한 우리는 아무도 없는 대사관 대기줄에서 기다리다가 1번 번호표를 받게 되었다. 입은 바짝 마르고, 준비 서류 목록을 다시 확인하며 손에 땀이 나도록 꼭 쥐고 있다. 중국에서 도착한 날 밤에, 제출해야 할 서류를 확인하다가 잘못 인쇄가 되었음을 발견하고 새벽까지 재인쇄를 한 후, 눈이 빠져라 몇 번을 확인했는지 모르는 이서류들이다. 혹시 모를 블루레터를 피하기 위해서.

© Photos by Mollie


블라인드 사이에 실루엣으로 영사들의 손이 보이고, 인터뷰를 하게 될, 또 인터뷰 결과를 예측가능한 오늘의 럭키 영사를 기대하며 어느 블라인드가 열릴지 숨죽이며 지켜본다. "그 사람만 아니면 된다는데."


번호가 불렸다. 우리의 번호였다. 하지만 첫 순서라 우리를 부르는지 몰랐다. 뭐라고 부르는지를 몰랐으니까. 번호의 뒷자리를 듣고, 눈치껏 엉거주춤 자세로 일어나서 눈으로 사인을 보내며 창구에 우리 가족은 순서대로 섰다. 우리의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다.


오! 럭키다! 운이 좋나 보다. 꼬장꼬장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나이스해보이는 백인 남자 영사다. 깔끔히 빗어 넘긴 머리와 젠틀함이 묻어나는 외모와 온화한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오른손을 드세요. 선서를 하겠습니다." 그때였다. 몹시 긴장한 남편은 자랑스럽게 왼손을 바짝 들었다. 나와 손이 부딪쳤고, 너무 놀란 나머지, "오른손! 저쪽!"이라고 외치며 남편의 발을 툭툭 찼다. 설마 영사가 왼쪽, 오른쪽도 영어로 모르나 의심이라도 할까 봐 조마조마했지만, 그런 남편을 보고 영사는 이해한다는 듯이 따뜻한 웃음을 지었다. 인터뷰는 주신청자인 남편에게 주로 질문이 주어졌고, 30개가 넘는 예상 질문을 달달 외워간 남편은 당당한 콩글리쉬로 인터뷰에 곧잘 대답했다. 뒤에 앉아있는 대기자들이 그 순간에는 느껴지지 않아서 창피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왜 미국에 가려고 하나요?" 한 마디를 물었을 뿐인데, 남편은 더 이상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심산이었는지, 나는 왜 미국에 가고 싶고, 나는 무엇을 전공했으며, 미국에 가서 어떤 일을 할 거고, 어느 지역으로 갈 거고, (윈도를 통해서 이미 회사에 지원을 한 증거 메일을 손에서 들어 보여주며) 이러한 회사들에 지원을 한 상태라며, 머릿속에 있는 예상 질문 답변들을 쏟아냈다. 이미 여러 답변을 듣자, 영사는 호의적으로 남편의 대답에 농담을 건넸고, 여러 나라의 신원 조회들을 보며, 이 나라 외에 다른 나라에 또 체류한 적이 있는지를 물었다. 짧게, "없다."라고 하면 되는데, 남편은 또 구구절절 답변을 해댔고, 영사는 웃으면서 "모든 서류가 잘 준비되어 있다. 점퍼를 잘 준비해서 가라. 여권은 일주일 안에 주소로 배송될 것이다."라며,


You're all set!(모든 절차가 완료되었다!)라고 이야기를 했다.


역시 감으로 인터뷰가 끝났음을 직감하며, 영사를 향해 함박웃음을 지었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Thank you so much!"를 연발하며, "된 거야? 어머 승인 난 거야? 근데 아까 점퍼는 뭐라고 한 거야?" 아이는 우리에게 "겨울에 가니까 점퍼 챙겨가래."라고 우리가 듣지 못한 친근한 인사를 설명해 주었다. 주변은 보이지 않았지만, 대기자들이, "어머, 승인됐나 봐."라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그날, 기다리고 기다리던 꿈에도 그리던 미국 영주권을 받아버렸다. 코로나로 인해서 지연된 프로세스로 준비기간만 거의 3년이 다 되었고, 그동안의 마음 졸임, 불안함과 막연한 기다림에 대한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듯했고, 아이는 근처 교보문고에서 미국 대학을 준비한다며 필요한 책을 잔뜩 구매했다. 그때는 몰랐다. 신분 해결이 중요한 미국 사회에서 영주권만 있으면 끝인 줄 알았으니까.




아이와 나는 출석 일수로 인해서 빨리 중국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미국 비자가 붙은 여권과 중요 서류들을 택배회사 사무실에서 찾아왔고, 이민 비자(Immigrant Visa)라고 쓰여있는 미국 비자를 보자 신기하기도 하고, 동시에 날짜를 보고 동시에 패닉에 빠졌다. 여권을 받은 날로부터 5개월 안에는 미국에 랜딩을 해야 했다.


남편은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중국 생활을 정리한 후 한국에 들어간 지 1달째, 나와 아들은 아직 중국에서 남은 2달을 버텨야 하는 시점이었다. 불과 몇 달 전에, 귀임 준비를 하며 인터뷰 일자가 이렇게 빨리 잡힐지 모르고 최소 1년은 한국에서 머물 생각에 가전과 가구를 새로 구입했고, 아이는 이미 외국인학교에 합격한 상태로 학비까지 납부했었다. 이 모든 걸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야 한다니 아찔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또 새로운 곳에 대한 적응을 다시 준비해야 하는 점도 부담되기 시작했다.


중국으로 돌아온 후, 나는 외국인 학교 환불과 동시에 아이와 함께 미국 학교 검색과 공립학교 등록 절차를 알아보며, 학교를 추리기 시작했다. 남편도 없이 혼자 중국 집 정리, 중국 학교 마무리, 중국 생활 정리와 함께 바로 이주할 미국을 동시에 알아보는 건 정보통이 없는 나로서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막막했다. 이미 몇 달 전에 한국에 귀국할 경우에 어떤 학교를 가야 할지 편입학과 국제학교 및 외국인 학교 지원에 몇 달을 신경 썼던 상태였고, 미국 공립학교 또한 모든 등록 절차와 필요한 서류 준비는 우리가 스스로 해야 했다.



주재원 생활을 하며 매년 귀임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 때마다, 이럴 바에는 우리가 스스로 갈 곳을 찾아서 떠나자는 가벼운 마음과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고생한다는데, 이때 아니면 언제 도전하냐고 큰 소리를 뻥뻥 쳤었다. 또 중국에서도 살았는데 어디서는 못 살겠냐며 "살아보고 아니면 한국으로 돌아가지 뭐." 지금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철없는 생각으로 이민을 저질러 버렸다.


남편도 당시에는 40대쯤 은퇴를 걱정하기 시작하며, 남자라면 한 번쯤은 누구든 온다는 사업병에 걸려서 한국에 가면 새로 해보고 싶은 일이 많다며 내게 종종 털어놓았고, 갑작스러운 주재원 귀임 이야기가 불어닥칠 때마다 남편과 미래를 이야기했었다. 처음에는 이민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남편이었지만, 여러 나라의 출장경력으로 다져진 사람이라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외국에서 공부하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기회를 줄 수 있음을 장점으로 생각했다. 또, 미국에서 또 다른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기대감에 부풀기도 했다.


- 비자피를 지불하세요. 그리고 그 영수증을 챙겨서 비자 만료가 되기 전에 출국하시면 됩니다.

- 미국에 도착해서 입국 심사관에게 이 노란 서류를 제출하면 되세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이후의 스케줄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독립적으로 이민을 준비했으니까. 심지어 너무나 급작스러운 스케줄로 어떠한 대책도, 방법도, 그냥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그렇게 겁도 없이 덜컥, 우리는 미국으로 와버렸다.


메인사진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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