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 4개월 만에 꿀직장을 제 발로 걸어 나왔다.
어머, 자기 얼굴이 왜 이래?
아빠! 얼굴이 왜 이렇게 동그래졌어? (깔깔깔)
우리보다 먼저 한국으로 귀국한 남편은 오랜만의 한국 생활이 어색하면서도 옛 추억에 젖어 푹 빠져있었다. 중국보다 비싼 물가와 시끌벅적한 도시 분위기, 뭔가 다들 바쁜 일상으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돌아가는 하루지만, 그 외에 남편을 사로잡은 건 한국 배달 음식과 간식이었다.
언제든 시간구애 없이 시켜 먹을 수 있는 남편의 입맛을 딱 사로잡은 국밥과 국물 요리, 퇴근 후 동네 마트에서 1일 1개의 아이스크림과 과자, 그리고 아내가 없는 남편이 선택한 아침은 매일 아침 가공된 구운 도넛 세트와 냉동 떡이었다. 남편이 자처한 행복한 한국 생활에 젖어든 지 1달이 지났을까? 영상통화로 만난 남편의 얼굴은 점점 터질듯한 달덩이가 되어 있고 얼굴에 기름이 줄줄 흘렀다.
그로 인해 콜레스테롤 경계에 있던 남편은 건강검진 후, 고콜레스테롤 증상으로 생애 첫 고지혈증 약을 처방받았다. 설마 하며 병원을 바꿔 봤지만 결과는 똑같이 다른 종류의 고지혈증 약 처방뿐이었다. 간이 콩알만 한 우리 부부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고 함께 운동을 하고 식이요법을 병행하여 관리에 들어갔다.
이 시점에 닥친 가장 큰 문제는 랜딩 하는 시기를 정하는 것이었다. 미국 출국 날짜를 정해야 이사도 결정하고 당장 1 달 뒤에 등교해야 하는 아이의 학교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비자에 찍힌 입국 만료 날짜는 가을이지만, 미국 학교는 8월 말에서 9월 정도에 새 학년을 시작했다.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당연히 학교 입학 전에 랜딩을 해야 했지만, 불과 2개월 전에 한국에 귀임하여 이제 막 한국 회사에 적응 중이던 남편의 입장에서 그 모든 걸 순식간에 정리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때부터 결정을 해야 할 순간마다 나와 남편은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매 순간이 겹겹이 쌓인 수많은 때를 기다리는 문제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와 아이는 학기에 맞춰 랜딩 하고 싶었지만 남편의 입장도 있어서 그걸 강요할 수는 없었다. 툴툴대다가도 남편의 말도 일리가 있어서, 우리는 비자 만료 직전에 랜딩 하기로 하고 그 일정에 맞춰 준비를 하던 중, 남편은 미국에 사는 지인과 통화를 하더니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다. 학기 중간에 전학을 오면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이 생길 수 있으니, 가능하다면 무조건 아이가 새 학년의 시작하는 걸 추천한다는 지인의 말. 남편은 서서히 흔들렸다.
남편이 원했던 건 랜딩 후, 나와 아이가 살 수 있게 어느 정도 정착 준비를 해 주고, 남편은 리엔트리 퍼밋을 신청해서 한국에 머물고 취업이 되면 미국으로 넘어오고 싶어 했다. 즉, 나는 아이와 먼저 미국에 들어가서 정착을 하고 본인은 한국에서 돈을 벌고 취업이 되면 천천히 미국으로 넘어오고 싶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혼자 미국 생활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고, 혼자 지낼 남편의 건강도 걱정, 또 운전을 못하는 나 자신도 짐스러웠고 한심했다.
엄마 아빠가 갈팡질팡하고 결정을 못하는 사이, 아이는 아이대로 자신은 어느 나라에서 어느 학교로 갈 예정인지, 언제 미국에 들어갈 건지, 자신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우리도 답을 줄 수 없는 질문을 하며 걱정하기 시작했다. 한창 학업이 중요한 시기에, 학교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자신의 미래에 불안해했다. 아이는 이미 미국 역사를 방학 내내 독학하며 미국 대통령을 줄줄이 외우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이 갈 수 있는 학교들의 방학숙제를 하며, 혼자 나름대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고 있었다. 지금껏 사교육 없이 자기 갈길을 스스로 찾아서 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그러면서 점점 자연스럽게 원래도 자기 통제력이 강한 편인데 부모 입장에서는 안쓰럽게 더욱더 철이 들어가고 있었다.
사직서를 들고 만감이 교차했다
지금까지 수입이 끊긴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불안한 미래. 그게 바로 남편이 가장 무서워하는 일이었고, 나보다 경제관념이 투철한 남편은 어떻게든 한 두 달이라도 더 버텨서 수입을 만들어가고 싶어 했다. 취업에 대해서 누구도 확신을 할 수 없었으니까. 이민에 대한 준비 기간이 조금 더 있었더라면 나았을까? 중국 주재원의 귀임 준비, 당시에 캐리어를 들고 떠돌이 생활을 하던 남편의 한국 생활, 나와 아들이 남겨진 중국, 외국인학교 지원 문제, 돌아온 낯선 한국 회사 등 모든 게 우리가 동시에 감당하기에 힘들었다.
그래서 남편은 안정된 생활을 꿈꾸며 어느 정도 기반을 마련할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주재원에서 배로 벌어들인 수입에서 이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상황이라, 더욱더 돈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러운 비자 스케줄로 스스로 사직서를 내야 하는 이 상황은 자신의 존재가 무너지는 느낌이었을 듯싶다. 사직서를 작성하고 한참을 바라보며, "내가 여길 그만두네. 이게 맞는 건가? 잘하는 건가? 가서 잘 살 수 있을까?" 항상 끝말은 "뭐 먹고살지?" 뿐이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20년 가까이 평생을 몸담은 회사, 몇 년만 있으면 대학 학비가 나오는 회사, 한국이 그 사이 많이 변했는지 반바지를 입고 출근해도 괜찮다며 한국 회사가 많이 좋아졌다던 회사, 좋은 인연들과의 끈끈한 관계로 추억이 많은 회사, 그 회사에 자신의 손으로 갑작스럽게 사직서를 내게 되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듯이 우리 가족은 이민을 준비하며 달콤함을 맛봄과 동시에 쓰디쓴 고뇌의 시간도 겪게 되었다. 미국 영주권을 취득함으로 꿀직장을 스스로 그만두며 준비 없는 퇴사에 남편은 많이 공허해했다.
앞으로의 수입은 예측하지 못했고, 점점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 우리의 돈도 이미 이곳저곳에서 구멍 난 채로 줄줄 새고 있었다.
대문사진 출처 :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