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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llie 몰리 Nov 18. 2024

미국이란 나라로 이민을 정하게 된 계기

가족의 운명이 바뀐 순간

이민을 위해서 큰 틀이 잡히기까지 아프리카 대륙을 빼고 우리가 갈 수 있는 이민 카테고리를 나라별로 나누어, 정보를 얻고 검색하는데만 몇 달이 걸렸다. 이미 이민에 대한 생각은 몇 년 전부터 하고 있었지만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고 나서야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로밍 전화를 통해서 업체에 전화하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메모장과 A4 용지 이곳저곳에 메모를 해서 나중에는 내가 어느 나라, 어느 비자에 관심이 있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한국 핸드폰 청구서에 몇 달간 로밍비는 몇십만 원이 기본이었다. 정보가 추려지면 남편과 의논하며, 정말 별의별 곳에 다 문의를 했던 게 기억이 난다.


아이의 교육만을 생각했다면 가장 편한 방법은 남편이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아이와 나만 해외로 가서 기러기 생활을 하는 것이지만, 나는 기러기를 할 만큼 마음이 강하지는 못했다. 결혼 생활 내내 남편의 장기 출장으로 가족이 떨어진 시간을 많이 보내기도 했고, 아이의 학창 시절에는 아빠의 자리가 꽤 큰 버팀목이 된다는 걸 , 이 사이좋은 부자 사이를 보며 늘 느꼈기에 그 사이를 갈라놓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아이의 교육보다 더 중요한 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가족들이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점과 또 현지에서 취업이 가능한 비자여야 했다. 또, 중국에서 말이 안 통하는 언어 속에서 살며 너무 고생을 했어서 그나마 접근하기 쉬운 영어권 국가를 원했다.


일단 투자이민은 비용이 우리에겐 너무 사악했다. 우리는 재산을 몇 년간 맡길 만큼 여유롭지 못했고 혹시나 그 돈이 잘못될까 봐 겁이 났다. 또 중국에서 해당 업체에게 지속적인 정보를 얻으며 복잡한 이민 과정을 밟는 건 물리적인 상당한 압박감이 있었다.


취업 비자는 남편이 바쁘디 바쁜 주재원 생활을 하며 한눈팔 여유조차 없었고, 40대인 남편은 갑자기 아무런 연고도 없이 낯선 나라, 낯선 회사에 취업하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했다. 이미 중국에서 코로나 통제로 우리는 심적으로도 힘들었기에 뭔가 잘 모르는 일을 벌이는 것 자체가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또 주재원 생활로 묶여있는 몸에, 언제라도 한국에서 부르면 들어가야 하는 입장이라 주재원 생활 도중에 해외 취업을 꿈꾸는 건 불가능했다. 또 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상담 후에 몇 업체들은 취업 스폰을 해준다며 영주권을 약속하기도 했고, 하마터면 그곳에 큰 금액을 내고 갈 뻔도 했지만, 남편은 제시받은 근무 조건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본인이 책임지고 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오랜 시간을 고민하고 망설이다가 포기하기도 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우리 수중에 그 돈을 내고 나면 남는 게 없기도 했고, 뭔가 과정이 석연치 않은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당신이 미국 국익에 왜 도움이 되는지를 설명하세요.


그러다가 나라를 하나씩 포기하게 되었고, 이민의 길이 쉽지 않음을 느끼며 점차 이민에 대한 열정의 불꽃이 사그라들 때쯤, 우리가 도전해 볼 만한 미국 비자 중, EB-2 카테고리의 고학력자 독립이민 비자를 알게 되었다. 고학력자라는 평상시에 쓰지 않던 단어도 생소하게 다가왔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비자는 NIW(National Interest Waiver)로 고용주의 스폰 없이 철저하게 신청인 자신의 역량이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걸 입증해야 하기에 남편은 막막했다. 이런 이민 시스템은 우리에겐 너무 낯설었다.


노동허가서를 면제해 주기에 승인만 된다면, 영주권을 받고 어떤 일을 하던지 취업에 제한이 없었고, 영주권이 있기에 현지 취업에도 메리트가 있었다. 동반 가족도 영주권 취득이 함께 됐고, 배우자인 나도 워크 퍼밋이 주어졌다. 아이의 경우에도 공립학교에 재학하며, 일정 조건을 만족시키면 대학교의 학비 혜택도 받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장점이었지만, 막상 닥쳐보니 단점이 될 수도 있는 어느 주로 가던지 제한이 없는 것도 상당한 매력이었다. 당시에는 그렇게 느꼈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하는 내 성격과 신중하다 못해 돌다리도 천 번은 두드려서 건너는 남편의 진중한 성격은 정반대였다. 여러 변호사들에게 자격 판정을 받으며 이제껏 알아본 이민 절차나 비용에 비해서 상당히 가성비 있는 도전이라고 느껴졌고, 취업에 신경을 쓸 필요 없이 일단 해외에 일정 기간 묶여있는 우리는 신청해 놓고 기다리면 시간이 해결해 줄 수도 있다는 점과, 내키지 않는 미국이었지만 복잡한 이민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던 우리가 중심을 잡고 내디뎌 볼 수 있는 꿈이자, 현재 우리의 상황에서 승부수를 던져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껴졌다. 어떤 프로그램에 얽매일 필요도 없고, 남과 사사로운 감정이 들어갈 일도 없는 철저한 개인적인 독립이민이라는 점이 이끌렸다.


보통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신청부터 비자를 받기까지 빠르면 1년이 걸린다고 알고 시작했는데, 코로나 발병으로 인해서 케이스의 적체로 많은 지연이 있었고, 우리는 불행 중 다행인지 총 이민 수속 절차 기간과 주재원 기간은 딱 맞게 떨어졌다. 물론, 큰 틀 안에서 남편이 해야 했던 서류 준비가 80-90%를 차지했고, 몇 개월 동안 평일 저녁과 주말을 반납한 채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한 번 되돌아보는 일에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예전 노트북과 자료를 꺼내서 오랜 기간 동안 본인이 해온 프로젝트와 업무 역량, 자신을 최대한 뽐낼 수 있는 일들을 찾아내서 정리하기 시작했고, 그게 가장 어려운 점의 하나였다. 비용은 비용대로 지불하고, 대부분의 일은 남편이 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계속 설마 내가 이게 되겠냐며 '에라, 모르겠다. 그럼 그냥 해보자.' 이런 마음으로 서류 준비를 해댔다. 그전까지 알아보던 이민과는 번거롭고 확연히 다른 종류라 남편은 컴퓨터에 앉아서 정신이 말짱해지면, '내가 왜 주말에 안 놀고 이걸 해야 하는 거지?'라며 현타가 오기도 했다. 나는 옆에서 남편이 받아왔던 회사의 상장까지 찾아내서 한 줄이라도 추가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럴 정도로 미국 이민국에 '나'를 세일즈하고 어필해서 그들이 나를 뽑게 해야 하는 일, 남편의 직장 생활과 인생의 풀스토리를 서류로 녹이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똘똘 뭉쳐있었다. 남편이 서류 준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나는 스케줄 관리 및 제출할 서류 인쇄 및 정보를 찾았고, 아이는 독수리 타법으로 나도 하지 못했던 우리의 긴 이사 이력 입력 페이지가 타임 아웃에 걸리지 않게 입력을 해줘서 어려운 관문에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 결과, 서류를 제출하고 미이민국에서 받은 날짜로부터 6개월 만에 우리의 케이스는 승인되는 쾌거를 맛보았고, 출장 가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중국의 코로나 통제로 정신없던 남편 역시 기대하지 않고 있다가, "그게 됐어?"라며 말은 그렇게 해도 서류 준비했을 때의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이 한순간에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 Screenshot on Mollie's phone


물론 서류 승인이 전부가 아니었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미 이민국의 서류 심사가 통과했을 뿐. 이후로도 이민비자 fee 납부 이슈, 미 국무부로 case가 이관되며 한국으로 신청한 우리 case는 느닷없이 주중 미국대사관으로 넘어갔고, 새로운 절차와 난관들을 맞으며, 문제가 생길 때마다 코로나로 장기 출장 가서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남편과 집에 있는 내가 원격으로 함께 준비를 했던, 지금은 까마득한 과거가 되었지만 진절머리 날 정도로 개인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승인의 축하의 세리모니는 잠시, 가족의 평생을 책임져온 남편은 막상 케이스가 승인이 나자, 다음 프로세스를 걱정하기에 앞섰다. "막상 되고 나니 기쁘고 너무 좋은데, 미국 가면 뭐 먹고살지? 취업이 잘 되려나?" 틈만 나면 앞날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미국 출장은 여러 번 갔지만, 잠깐 업무차 방문한 출장과 가족의 거처를 옮기는 이민은 차원이 다름을 남편은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무한 긍정인 나와 아들은 어떻게든 잘 되겠지, 그때 걱정은 그때 가서 하자며 남편의 깊은 속내는 알아주지는 못했다. 그저 우리 남편, 우리 아빠 대단하다며 치켜세울 뿐이었다. 이런 철없는 아내를 둔 남편은 얼떨결에 가족에게 미국 영주권을 선물한 가장이 되었고, 자신의 새로운 인생 2막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남편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이제부터가 제대로 된 고생의 시작이었다. 현실은 쓰디썼고 막막했다.


대문사진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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