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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삼식이 백수남편과 24시간 전쟁 중

이러려고 미국에 왔니?

by Mollie 몰리

이민 후 미국 정착을 위한 최소한의 기반 마련을 하는데 3개월쯤 걸린 것 같았다. 말이 3개월이지, 이 기간은 어느 정도 세팅의 의미이지 매일이 모르는 것 투성이에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사는 느낌이었다.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1달 만에 무턱대고 미국으로 직장을 버리고 건너왔으니 그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미국에 온 지 시간이 꽤 흘렀고,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눈을 감을 때까지 남편과 이 집에서 하루 종일 함께 붙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점점 잦은 싸움과 다툼이 생기고 서로의 간섭과 참견, 잔소리에 의미 없이 신경싸움을 하는 날이 부쩍 많아지기 시작했다. 아이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냉랭한 집안 분위기에 눈치를 보며 화해를 위한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 주로 내게 다가와서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지만, 아빠 편만 드는 것 같아 서운하기도 했다. 엄마는 엄마의 원래 일상을 살고 있지만, 아빠는 갑자기 하던 일을 못하는 상황이니, 엄마도 힘들겠지만 아빠가 취업만 되면 괜찮을 거라고 이해하자며 철없는 부모로 인해서 아이는 반대로 더욱더 성숙해져 갔다.


결혼 후, 남편은 늘 출근을 했고, 출장도 많았기에 혼자 아이를 키우고 고생했던 적이 많아서, 늘 남편의 부재로 아쉬움이 많은 나였는데, 인생을 살다 보니 또 그때 내가 느꼈던 아쉬움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엄마들이 장난스레 나중에 우리가 나이 들었을 때 삼식이 남편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우리는 늘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았어서 삼식이도 좋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던 나는 점점 사라져 갔다.


심지어 신혼도 아닌, 중년의 40대 부부가 하루의 모든 순간을 함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런 경험이 또 처음이었다. 초반에는 두려운 미국 생활을 헤쳐나가는 데 있어서 남편이 늘 곁에 있으니 든든하기도 했고, 운전을 못하는 나는 남편이 모든 걸 데려다주는 시스템에 어느샌가 익숙해져 있었다. 이곳 미국은 차가 없이는 어디도 갈 수가 없는 외딴섬에 사는 느낌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모두 집에 있으니, 스쿨버스를 타는 아이도 점점 아빠가 데려다주는 등굣길을 선호하기도 했고, 새벽부터 도시락을 싸서 나 역시 괜히 둘만 보내는 등굣길이 못내 아쉬워서 괜히 그 차에 함께 타고 아이를 학교에 바래다주기도 했다. 처음 몇 달은 모든 게 재미있고 신기하고 낯설고 아직도 우리가 미국에 와있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으니까.



집에 오면 난 늘 해오던 집안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남편은 미국 랜딩 후부터 손에서 놓지 않고 있던 취업을 위한 구직 활동에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썼다. 잡서칭을 하고 이력서를 손보고, 지원을 하고... 그렇게 갑자기 40대에 멀쩡한 직장을 버리고 미국에 이민 온 후 백수가 되어버린 남편은 날이 갈수록 한숨이 늘어갔고, 그래도 6개월 안에는 취업이 되지 않을까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믿음이 깨지면서 현실을 부정하기에 급급했다. 미국에서의 취업은 하늘의 별따기란 말이 모자를 정도로 쉽지 않았다. 점점 남편은 작은 거에도 남 탓을 하기 시작했다.


이민 결정은 우리 가족 모두의 동의였지만, 해외 생활을 가장 원했던 건 아이와 나였고, 우리보다 해외 체류 경험이 많은 남편은 해외생활은 동의하나, 지금까지 우리 세 식구를 먹여 살렸던 가장답게 '뭐 먹고사나?'라는 걱정 때문에 이민을 위한 과정 속에서도 본인이 가장으로서 경제활동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한국, 중국 생활에서는 그다지 내게 필요 없었던, 아니 불필요했던 운전이 미국에서는 발목을 잡았다. 한국에서는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늘 마트가 즐비해있었고, 온라인 배송도 편리했다. 단지 앞에 구멍가게만 내려가도 그날 저녁에 필요한 애호박, 두부, 버섯, 콩나물 정도는 쉽게 살 수 있었다. 중국은 한국보다 더 편리했던 배송 시스템으로 계란, 우유만 카트에 넣어도 저렴한 배송비로 장을 볼 수 있으니 그야말로 살림하기엔 천국이었다.


하지만, 미국 이곳은 달랐다. 많이 달랐다. 김치나 된장, 고추장, 육수팩, 조미료 등의 한식을 위한 재료는 한인마트에서 구입을 하고, 내가 사야 할 물품의 종류와 수량에 따라서 여러 종류의 마트를 동시에 가야 했다. 직접 가는 건 물론이고, 장본 물건들을 트렁크에 실어서 집에다가 정리할 때쯤이면 이미 기력이 다 빠져서 밥 해 먹을 기운도 없기 일쑤였다. 그냥 마트 한 두 개 다녀오고 밥 해 먹으면 그날 하루는 다 가는 비생산적인 하루.


거기에 택배 반품은 배송기사가 집을 방문하는 게 아니었던가. 미국은 쇼핑 반품을 위해서 직접 지정 장소에 갖다 주어야 하는 시스템이라서 그 반품을 위해서 또 운전을 해서 그곳을 들려야 한다는 게 에너지 소모가 많이 됐었다. 게다가 운전까지 못하는 나는 마트나 반품을 가야 할 때마다 남편한테 같이 가자고 부탁을 했고, 이게 점점 쌓여가자 남편의 불만도 한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이미 IKEA에서도 반품 때문에 여러 번 장거리를 갔었고, 초반 몇 개월 동안 밥솥, 소파, 매트리스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여러 번 반품 후 정착하고, 소파, 가구 등 직접 모든 걸 처리해야 하는 시스템으로 질린 상태였다.


내가 여기 운전기사로 왔니?

그러니까 나는 리엔트리 퍼밋 써서 한국에서 일을 좀 더 하고, 너희들만 먼저 왔으면 내가 돈이라도 벌어서 보내줄 수 있잖아.

뭐 좀 하려고 하면 계속 어디 가자고 하고,,, 난 도서관을 간다고 했잖아.


내 성격에 이에 질 리가 없다.

그럼 나는 밥 세끼하는 건 쉬운 줄 알아?

지금 취업이 당장 안 되는데 한국에 있다가 돌아오면 취업이 된다는 보장 있어?

그리고 지금 차가 당장 1대인데, 도서관을 가면 난 마트에 어떻게 가라고.

© Vitaly Gariev, Unsplash

아이가 클럽에서 끝나면 또 데리러 가야 했고, 서로 스케줄이 다른데 차 1대로 시간을 맞추려니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운전을 안 하던 나는 운전도 너무 겁이 났다. 삶이 지치고 힘들고 우리의 생각대로 되는 게 없으니 서로 칼날같이 신경이 예민해지기 시작했고, 뭐든 그냥 부딪쳐보자, 시간이 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나와는 전혀 다른 걱정 많고 계획적이고 행동에 옮겨지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남편은 점점 모든 걸 애꿎은 미국 탓으로 돌리기 일쑤였다.


내가 미국에 괜히 왔나 봐. 한국은 안 이럴 텐데. 중국은 이랬는데.

한국에 살았던 적은 거의 7년 전, 중국에서는 주재원. 지금이랑 많이 다른 상황이지만, 남편은 그냥 그 말이라도 해서 현실을 도피하는 것 같아 보였다.


성격이 단순해서 웬만한 건 잊어버리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쳐다보는 아내와, 평생을 가장으로 살아온 책임감과 걱정으로 중무장한 남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집에서 삼시 세끼를 같이 먹고 작은 행동 하나에도 트집을 잡고, 자기주장을 내세우며 차 없으면 어디든 갈 수 없는 이곳, 싸워도 속상해도 이 집 밖을 탈출해서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단지 산책과 벤치라는 현실이 마치 창살 없는 감옥같이 느껴져서 많이 힘들었다.


이러려고 미국에 왔나? 이 말, 자꾸 가보지 않은 과거를 되새김질하는 그 말, 그게 너무너무 듣기 싫었다. 그런데 그는 우리는 갈 곳 없는 이곳에서 늘 24시간을 서로 원하지도 않는데 붙어서 마주쳐야 했다. 늘 내 앞에서 밥때가 되면 식탁에 앉고, 어쩔 수 없이 마트를 같이 가면 또 서로 다른 입장으로 티격태격하며, 남편이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서 미디어 중독자처럼 유튜브와 드라마를 꿰뚫고 있는 모습조차 너무 꼴 보기 싫었다.


미국 영주권이 무슨 소용인데? 영주권 하나만 달랑 들고 오면 꽃길이 펼쳐질 줄 알았던 우리는 결혼 후 인생 최대의 시련과 고비를 맛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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