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나 기초수급자? 저소득자?
그럭저럭 입에 풀칠하며 지내던 중 의료비가 한 번 크게 들어갈 일이 있었다. 안 되는 영어로 병원을 알아보는 것도 녹록지 않던 그때 받지도 않는 병원의 리셉션에 전화를 걸어서 대기를 하고 예약과 치료 관련 상담을 하던 중, 직원을 통해서 보험에 대한 소개를 받게 되었다.
미국은 내가 가지고 있는 의료 보험에 따라서 병원이 제한적이기도 하고, 사보험을 통해서 보험 케어를 받지 않으면 가격의 부담이 상당히 큰 듯했다. 급하게 이민을 준비했던 탓에 보험 같은 것도 알아보지 못했고, 이렇게 남편의 취업 공백 기간이 길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우리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보험도 없어요. 그건 뭐죠. 가입은 어디서 하죠?
다행히 한 직원의 느릿하고 차분히 기다려준 성품 덕에 마켓플레이스라는 곳에서 보험 신청이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당시 달력과 쭉 찢어놓은 종이에 사이트 주소, 전화번호 등 알아보기 힘든 글씨체로 휘갈겨 썼던 메모들, 통화 중에도 절반이나 알아들었을까? 사이트에 들어가서 일일이 가족을 가입하는 것부터 내용을 이해하기까지, 또 접수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기까지 몇 달의 시간이 걸렸다.
지원 절차는 어렵지 않아 보였지만, 처음이라 많이 헤맸다. 각 가족의 이름과 신분, 사회보장번호, 집주소와 수입, 회사 등에 대한 개인 정보를 입력하고 신청을 하면 심사 후에 결과가 집 주소를 통한 우편으로 날아왔다. 현재 미국에서의 수입은 없었고, 예상 수입을 적는 거였나? 벌써 기억이 가물하지만, 우리는 남편의 한국에서의 마지막 수입까지 달러로 환산하여 적었고, 향후 몇 달 뒤에는 취업이 될 걸 상상해서 예상 수입을 적었던 것 같다.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이 기억조차 왜곡되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지원을 하는 과정에서 일반 사보험을 들려고 했던 우리는 정보를 입력하면서부터 자꾸 우리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감을 감지했고,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까막눈 수준의 보험 내용을 보며 사이트에서 시키는 대로 신청을 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현재 상황에서 주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저소득층 지원 혜택을 신청하고 있음을 알고 적지 않은 충격에 빠져버렸다.
신청서를 온라인으로 제출하면서 주정부에서 해주는 보험으로 연결이 자꾸 되어서 전화 통화를 통해서 "우리가 들고 싶은 보험은 주정부에서 하는 게 아니라, 오바마케어라는 거예요." 이 한 마디를 하고 싶었지만 전화 연결은 잘 되지 않았고, 마켓플레이스가 오바마케어인지, 이게 주정부 저소득층 보험인지 모든 게 얽키설키 섞여버린,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신분 증명을 위해 영주권을 보내는데, 회신용 무료 봉투가 공공기관 측에서 왔지만 그게 뭔지 몰라서, 친절하게 근처 UPS에 가서 우리 돈을 주고 비싸게 신분증을 보내는 멍청한 짓도 하고, 뭔가 바쁘게 돌아가는데 대체 우리가 뭘 하는지도 모르겠던 그 답답한 상황. 하지만 어디에도 물어볼 곳이 없어서 생으로 부딪쳐야 하는 매 순간이 힘겨웠다. *UPS가 몇 달 동안 미국 우체국인지 알고 비싼 배송비에 원래 미국 물가가 비싸서 그런 거라고 착각하며 살았다.
결과적으로 한국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던 화려한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단 몇 달 만에, 저소득층을 위한 의료 커버리지가 승인되어 버린 미국의 기초수급자인 저소득층 신세가 되어버렸다.
집으로 의료보험 카드와 안내장이 왔는데, 병원비와 응급실 등 병원비가 무료도 있고 비용이 말도 안 되게 저렴했다. 이 혜택을 받아서 기쁘고 신나는 게 아니라, 이걸 받는 게 맞나? 현재 우리 수준에 승인이 됐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계속 무직은 아닐 텐데, 이걸 사용하는 게 올바른 행동일까? 지금 우리가 그 정도가 된 건가.
아이를 키우면서도 누구한테 정보를 잘 묻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정보와 환경만으로 살아왔던 나는, 이 상황이 많이 불편하고 오히려 걱정이 되었다. 뭔가 우리가 잘못하는 기분이었고, 죄를 짓는 이상한 기분. 이거 뭐 혹시 식품 보조까지 받아야 하는 거야, 아니면 현금 보조까지 신청하면 승인되는 거 아냐.
아이의 학교에서도 이메일이 왔다. 정말 난감했다. 이메일에 적힌 학교 담당자에 전화를 걸어 문의를 하니, 아이가 저소득자로 분류되어 있으니, 점심도 무료고, 심지어 SAT나 AP 같은 테스트 비용도 지원된다고. 너무 화들짝 놀래서 아이는 혜택을 받지 않을 예정이니 이름을 삭제해 달라고 요청하며 씁쓸한 마음에 한 동안 말없이 멍하니 앉아있었다.
우리 점심값 낼 돈 있어. 테스트 비용도 못 낼 정도는 아니야. 그럼 안 받는 게 맞지. 그리고 이민 온 지 얼마 안 되어 무직인 거니 곧 괜찮아질 거야.
라고 혼자 다독이며 주문을 외우기도 했다.
아이는 엄마 아빠가 돈 때문에 걱정하는 걸 아니까, 자기는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저소득자 아이라고 알아도 괜찮으니 테스트 비용이라도 할인받는 게 낫지 않냐며 해맑은 대답을 해대니 또 어찌 안쓰럽지 않을 수가 있나.
고지식하고 대쪽 같은 내가 머리와 마음으로 이 상황이 이해가 갈 리가 없다. 안 그래도 이방인으로서 기본적인 말조차 똑바로 하지 못하는 게 늘 마음에 걸리는데, 거기에 기초수급자 딱지까지 받고 나니 정신이 더 똑바로 차려졌다. 나는 남편한테 이야기했다.
우리 이거 그냥 다시 철회하자. 나는 좀 많이 불편해. 하지만 남편은 우리 현재 상황이 이 정도가 맞으니 승인을 해준 거고, 내가 직장을 구할 때까지 혹시라도 만에 하나 큰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그때를 대비해서 가지고만 있자고.
그렇게 결국 우리는 저소득자를 위한 의료보험 혜택 카드를 유지는 하되, 얼전케어나 병원을 갈 일이 있을 때는 늘 한결같이, "We don't have insurance. We'll pay cash.(우리는 보험이 없어요. 현금으로 낼게요.)"라고 이야기하며 Self-pay(자비 부담)로 병원을 다녔다. 물론 병원비는 늘 보통 $250(약 35만 원) 언저리에서 시작되었다. 어떤 검사를 할 때 우리가 보험이 있는 것 같다고 나오면,
"아, 그거 사용 안 해요. 그냥 캐시페이할게요.
결국 그 카드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채로 몇 달 동안 구석 어딘가에 처박혀있다가 결국 기관에 방문하여 "우리의 의지로 해지하겠습니다."라고 A4 용지에 적고 나서야 그 달 말에 해지가 되었다.
미국 이민은 우리에게 인생의 롤러코스터를 제대로 타게 해주는 것 같다. 내 인생 통틀어서 이민 정착기가 인생에서의 최하의 레일에서 매달려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허우적대는 그 순간인 듯하다. 그래도 미국이 첫 해외살이가 아니라서 그런지, 아니면 중국에서 내 의지대로 제멋대로 살아서 그런지, 말은 못 해도 행동력 하나는 늘 끝내주는 우리, 아니 아들과 나. 불행 중 다행인 건 나와 아이는 생각보다 더 많이 단순해서 뒤를 돌아보지 않고 현재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집중하는, 남 눈치 따위는 보지 않는 붕어빵 모자였다.
그래서 남편은 혼자 외롭기도 했고, 우리로 인해 위로를 받기도 했고, 인생의 최하의 굴곡점에서 또 많은 걸 경험하고 배우는 그런 시점이었다. 바로 그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