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법을 어겼어!
이방인으로 미국에 와서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벙어리로 사는 것도 답답하지만, 더 당황스러운 건 그들의 사회에 껴야 할 때의 나의 행동과 반응이다. 미국 사회의 분위기는 확연히 한국과 다르다는 게 느껴질 때가 있다. 산책을 하다가도 서로 마주치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거나, 미소라도 지어 날리면서 적막감을 깨고, 어딜 가나 조금만 스치고 지나가도 I'm sorry. Excuse us. Pardon me. 를 쉽게 들을 수 있고, '기다림'과 '배려'에 대한 기본 인식이 우리와는 개념이 다르다는 게 느껴진다.
우리 생각에는 뭐 저 정도가 그렇게 미안할 일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과하다 싶으면서도 어느새 나도 그들의 문화를 배우며 어쭙잖은 영어 발음으로 "미안하다, 실례합니다."를 쏟아내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쇼핑몰이나 마트에서 줄을 설 때 서로 간의 거리가 1m 정도는 되게 간격 유지를 하는 걸 보고 정말 그들이 이야기하는 Private zone을 엄청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걸 알게 되고, 자신이 먼저 문을 열어도 뒷사람이 있는 게 느껴지면 자기가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도 문을 끝까지 놓지 않는 모습을 많이 본다. 물론, 먼저 가라고 양보를 많이 하기도 한다.
운전할 때도 이 모습은 변함이 없다. 특히 사람 우선이라, 주차장에서 사람이 지나간다던지, 근처에 사람이 있으면 마치 얼음땡 놀이를 하듯 운전 중인 차는 얼음이 되어 멀찌감치서 건너가는 사람을 보호하고, 길을 건너려고 기다리는 사람을 보면 먼저 건너가라고 손짓을 하기도 한다. 길을 건너는 사람들도 차가 멈추어 양보를 해주면 손을 흔들어서 웃으며 인사를 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양보와 배려가 사회 중심을 꽉 잡고 있는 느낌이 든다.
물론 대도시 여행에서는 서로 바쁜 현대인들의 모습과 교통 체증에 이런 모습을 많이 볼 수는 없었고, 등교와 출근 전쟁인 아침 시간에는 그 여유는 온데간데 사라진채, 좌회전 신호가 바뀌고 1초만 늦게 가도 바로 뒤에서 "빵빵" 소리와 함께 성격 급한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날들도 있다. 하지만 하루가 느리게 흘러가는 여느 미국의 시골스러운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이 질서가 사람 사이에서의 당연한 문화 같다.
나도 상대를 존중을 했으니 그 배려를 받고 싶어 하는 게 인간 심리인가 보다. 서로 이 무언의 질서가 통하면 아름다운 순간이 되지만, 가끔 무례하게 정지선을 넘거나 횡당보도를 밟고 정지해 있는 차를 향해서 길을 건너는 행인이 차를 향해서 두 손을 옆으로 뒤집으며 황당하다는 듯 어깨춤을 추듯 과한 제스처를 취하고 얼굴을 찡그리거나, 또는 신호를 안 보고 비보호 좌회전을 하는 차를 향해서 길가는 행인이나 자전거를 탄 사람이 손가락 욕을 하며 불쾌감을 대놓고 표시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그래서 가끔 신호 끝자락에 어쩌다가 살짝 횡당보도를 걸쳐서 급정거를 하게 되면 사람이 있나 없나부터 살피게 된다. 마음의 상처를 덜 입기 위해 혹시나 먹을 욕에 대비하려고.
이 문화 때문에 난감한 상황이 집에서 생긴 일이 있었다. 남편과 볼일을 본 후에 집에 들어가려고 단지를 통과하고 있었다. 길과 길 사이에 주차장으로 차가 들어가는 도로만 통과하면 집이다.
그 도로의 끝자락에 한 빼빼 마른 할머니가 걸어가고 있었고, 남편은 그 길목에 들어가기 전에 사람을 보고 살짝 멈추며 속도를 줄여서 잠시 기다렸다. 그 할머니가 한 발자국만 걸으면 사람들이 다니는 인도였기에 우린 우측으로 바짝 붙어서 그 길을 지나갔다. 5미터 앞에 우리 집이었으니까.
별다른 생각 없이 트렁크에 가득 쌓인 짐을 내리고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기에 얼른 밥 해 먹을 생각뿐이었던 우리는 트렁크의 짐을 내려서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먼저 차에서 내려서 냉장고에 남아있는 찌개를 데우고 짐을 가지러 차고로 가는데, 남편이 누구랑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혼자 있는데 누구지? 여기 아는 사람이 없는데?
가까이 다가가는데 내 귀에 들린 문장은 할머니의 꼬장꼬장한 한 마디.
Don't do that again! You're against the law!!! 다시는 그러지 마라! 너는 법을 어겼어!!
웬 백인 할머니가 잔뜩 화가 나서 훈계를 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고 남편은 Okay, sorry라며 혼이 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때까지도 그 할머니가 누군지 몰랐다.
뭐야, 무슨 상황이야?
아, 아까 본인이 길 건너가는데 우리 차가 지나가서 자기가 죽을 뻔했대. 법에 위배된다고 한 마디 하러 왔나 봐.
남편도 차에서 짐 꺼내는데 갑자기 차고 앞에 나타난 백인 할머니에 당황해서 처음에는 뭐라고 하는지 몰라서 어안이 벙벙하다가, kill 어쩌고 하길래 남편은 자기가 동물을 친 줄 알았다고.
놀래서 블랙박스를 켜보니, 할머니가 거의 건너갔을 때쯤 우리는 기다렸다가 오른쪽 끝으로 붙어서 갔는데 이게 그 할머니한테는 자기가 길을 다 건너지 않았는데 물론, 그게 한 발자국이었을지라도 아직 자신의 몸은 온전한 인도가 아닌데 차가 지나갔다는 그 상황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나 보다. 그래서 발길을 돌려 굳이 우리 집 차고까지 와서 따끔하게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사실 할머니의 깡마른 행색을 보면 일반적이지는 않아서, 괜히 겁도 나고 말도 잘 못하는 동양인의 집까지 알았으니 괜히 나중에 또 시비를 걸까 봐 블랙박스의 영상을 핸드폰으로 옮겨놓았다.
자신의 밥벌이를 버리고 온 미국에서 아직 좋은 일을 경험하지 못한 남편은 안 그래도 미국이 왜 좋은지는 모르겠는데 자신한테 직접 이런 일이 생기자 사람들이 무섭다며 입이 잔뜩 튀어나왔었지만, 여기 사람들 문화가 그렇다면 우리가 존중하고 따라야지 어떻게 하겠니라며 아까 CVS에서 좋은 할머니도 있지 않았냐며 우쭈쭈 해주었다.
집에 돌아오기 직전 잠시 들렸던 CVS에서 내가 손에 물건 2개를 들고 계산대에 서있는 모습을 보고 앞에 쇼핑카트에 5-6개 정도의 물건을 담은 백발의 백인 할머니가 "너 물건이 나보다 수가 적으니 먼저 계산해."라며 괜찮다고 먼저 계산하시라고 하는데도 너무 해맑게 웃으시면서 내 뒤로 자리를 옮기는 일이 있었다. 갑자기 훅 들어온 말에 다른 물건 살 게 있어서 가시는 줄 알았는데 내 뒤로 가셔서 이 배려에 또 감사하고 감동했던 순간이 있었다.
이런 배려를 보면 내가 성격 급해서 조금이라도 빨리 줄 서려고 하는 게 부끄러울 때도 있고, 남을 생각하고 배려가 일상화된 이 사회에서는 성격 급한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는 아직 적응기간이 필요한 것 같다. 물건을 살 때도 갑자기 말을 걸거나 놀라운 친화력으로 다가오는 모습들에 아직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웃고 말 때가 많다.
같은 백인 할머니들이지만 사람 나름이야. 뭐 앞으로는 조심하자.
이 날 뒤로 사람이 있으면 자동으로 얼음땡 놀이를 하고 있는 우리다. 앞으로의 험난한 미국 생활이 계속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