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 뉴미디어 중계 유료화, 기타 변화에 대한 생각
2024 시즌은 40년을 넘은 한국 프로야구에서 가장 큰 변화가 시작된 시즌입니다. 개인적으로는 3월 31일로 13년 가까운 프로야구단 프런트 직원을 끝내고 팬이 입장으로 다시 돌아간 해이기도 합니다.
세계 최초로 사람이 아닌 카메라를 이용한 볼-스트라이크 판정 시스템(ABS)이 도입돼서 시범경기부터 적용이 시작됐습니다.
기존 지상파계열 TV 중계는 여전히 무료지만 뉴미디어 중계권은 티빙(TVING)에 넘어가며 드디어 부분 중계 유료화가 시작됐습니다.
이 두 가지 큰 변화 외에 올해는 시범운영이지만 경기 스피드 업을 위해 메이저리그에서 먼저 시행한 피치클락이 도입됐고 역시 메이저리그에서 먼저 시행한 베이스 크기 확대와 수비 시프트 제한도 시행됐습니다.
3가지 이슈에 대해 한편씩, 먼저 최근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ABS에 대한 이야기부터 의견을 써보겠습니다.
KBO 홈페이지에 올라온 2024년부터 달라지는 규정과 규칙 변화는 아래 링크를 참조 바랍니다.
https://www.koreabaseball.com/Kbo/League/GameManage2024.aspx
한때 로봇심판 또는 AI심판이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지만 카메라를 통해 미리 설정된 스트라이크존에 따라 볼-스트라이크 여부를 판정하는 시스템입니다. 몇 년간 퓨처스리그에서 테스트를 거쳐 시범경기부터 적용해 보니 사람이 하던 시절과 시간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미국도 독립리그, 마이너리그에서 테스트만 진행했을 뿐 아직 메이저리그에서는 시행하고 있지 않았는데 KBO에서 전격적으로 시행하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이 판정하면서 규칙 상의 스트라이크존과 조금씩 다르고 실수든 고의든 선수와 팬 모두 납득하기 힘든 판정이 일부 있었는데 이런 점이 확실히 없어졌습니다.
아래 이미지는 KBO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ABS 판정 기준입니다.
중계를 보고 있으면 허공에 사각형이 떠 있어서 스트라이크 존이 서 있는 평면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규칙상의 스트라이크존은 위 KBO 이미지처럼 5각기둥이 허공에 떠 있는 입체입니다.
심판은 포수 뒤에서 판정하고 타자들은 홈플레이트 한쪽에 서서 옆으로 고개를 돌려서 공을 보지요. 시청자들이 보는 중계 영상은 가운데에서 찍은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비스듬하게 보입니다. 덕아웃의 감독, 코치들도 높낮이는 보여도 좌우 편차는 잘 알아보기 힘듭니다.
실제 미국 심판들이 내린 스트라이크 판정을 보면 사각형보다 원형이나 타원형에 가까워서 위아래 모서리 쪽 공은 스트라이크 판정을 잘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좌타자냐 우타자냐에 따라 편향이 생기는 것이 보입니다. 특히 좌타자는 몸 쪽 깊은 볼이 스트라이크로 판정을 받고 바깥쪽 공은 볼로 판정한 비율이 높게 나타났습니다. 규칙과 차이가 너무 많이 납니다.
볼카운트 3 볼 0 스트라이크일 때는 볼을 스트라이크로 판정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반대로 0 볼 2 스트라이크에서는 스트라이크를 볼로 판정하는 비율이 높아진다는 분석 결과도 있습니다.
주심은 사람이기 때문에 일종의 인지 편향이 나타난다는 것이 세이버메트리션과 심리학자들의 분석입니다.
그런데 이제 기계가 규칙에 나와있는 대로 판정을 하니 그동안 사람이 판정하던 존과 차이가 발생했습니다.
일종의 인지부조화가 발생한겁니다.
자료 출처 : Beyondtheboxscore.com 2009년 포스팅
( https://www.beyondtheboxscore.com/2009/11/5/1107712/umpire-strikezone-analysis-the )
이러한 사람이 가지는 인지편향을 없애고자 도입한 것이 ABS입니다. 기계는 말 그대로 기계적으로 판정하니까요.
하지만 일부 선수들(일부 감독도)은 그동안 익숙하던 스트라이크 존과 다르고 심지어 구장마다 스트라이크 존이 다르다면서 강하게 불만을 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팬들은 경기 중에도 매번 달라지던 스트라이크 존이 일정해졌다고 매우 만족해합니다. 그렇다면 선수들은 왜 불만일까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제가 현장에서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야구장이라는 하드웨어를 바탕으로 생각해 봤습니다.
야구가 다른 구기종목과 많이 다른 점 중 하나는 경기장의 규격이 제각각이라는 점입니다. 홈플레이트에서 외야 펜스까지의 거리와 펜스높이는 야구장마다 모두 다릅니다. 보통 구기종목은 공이 정해진 선을 벗어나면 경기가 중단됐다 재개되지만 야구는 파울지역으로 공이 날아갈 때도 인플레이인 경우가 많습니다.
덕아웃도 비슷한 듯 하지만 위치가 다르고 선수단이 지켜보는 높이가 제각각입니다.
야구장 자체가 다르면 카메라의 설치 위치와 높이, 홈플레이트까지의 거리 등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기계는 여러 번의 측정 데이터를 바탕으로 '보정'이라는 것을 해서 스트라이크 존을 정할 수 있습니다.
반면 사람은 오랜 훈련을 통해 자신만의 스트라이크존을 형성하고 있지만 던지는 환경은 물론 야구장이라는 가장 큰 환경이 매번 바뀝니다.
그렇다면 야구장이 달라지면 선수들이 보는 공도 다르게 보일 수 있을까요?
1. 마운드의 높이와 경사가 모두 조금씩 다르다
규격화된 마운드와 내야 지역 역시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야구장 필드는 배수 방식이 2가지가 혼용되어 있습니다. 잔디 아래 모래층에 배수관로를 깔아서 스며든 물을 배수하는 직하배수 방식과 표면으로 흘러서 야구장 외곽의 배수로를 통해 배수하는 표면배수 방식입니다.
직하배수가 아주 중요하지만 단시간에 많은 비가 오면 빗물이 땅에 스며드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표면배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모래층이 다져지고 공극이 메워져서 배수능력이 점점 떨어지기 때문에 표면 배수를 잘해야 물이 잘 고이지 않습니다.
미국 야구장 건설과 관리에 관한 책에 보면 야외 구장의. 경우 우천 시 배수를 위해 내야 필드 경사도는 1~2%, 외야는 0.5~1%를 권장합니다. 국내 야구장은 장마철에 단시간에 비가 많이 오고 배수가 좋지 않은 경우도 많아 이보다 좀 더 경사가 센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보통 야구장 외곽 배수로의 높이는 내외야 모두 동일한데 외야가 훨씬 넓기 때문에 배수로까지 경사도를 이론대로 잡기가 어렵습니다. 외야 센터 펜스에서 2루 베이스까지를 대략 70m로 잡고 경사가 0.5%만 돼도 외야펜스 부분과 내야 베이스 부분의 높이 차이가 35cm가 납니다. 파울지역은 폭이 좁으니 경사가 훨씬 세집니다.
게다가 천연잔디 구장은 매년 잔디 생육을 위해 배토(모래를 일정 두께로 뿌리는 형위)를 반복하면서 여러 해가 지나면 조금씩 레벨이 올라갑니다. 참고로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은 거의 매년 잔디를 새로 깔아서 이런 문제는 없다고 봐도 됩니다.
마운드의 높이는 홈플레이트 기준 25.4cm(10인치)가 높아야 하고 경사도 1피트(29.4cm)마다 1인치(2.54cm)씩 낮아지도록 규정되어 있지만(경사도 1/12) 마운드 주변 내야 필드의 표면 경사를 잡기 위해 마운드 주변 원의 높이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필드 경사가 셀수록 마운드의 경사가 완만해지기 쉽습니다. (아래 이미지 참조)
반면 제가 2020년 초에 그라운드 관리 연수를 위해 방문했던 플로리다의 필라델피아 필리스 스프링캠프 야구장(BayCare Ballpark)의 경우 내야 경사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러면 마운드와 마운드 주변 필드의 높이 차이가 더 나게 됩니다. 미국은 표면배수보다 직하배수를 더 중요시하는 것 같습니다.
한 외국인 투수가 미국 야구장에 비해 한국 마운드가 좀 더 완만하게 느껴진다고 하는 인터뷰를 본 적 있는데 저는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봅니다.
매년 개막 전 KBO에서 구장 규격에 대해 측정합니다. 하지만 투수판의 높이와 경사, 거리, 베이스 간의 거리와 베이스의 높이는 측정하지만 필드의 경사는 측정하지 않습니다. 필드 경사는 야구 규칙에 나와있지 않아서 구장마다 환경이 조금씩 다릅니다.
이 차이는 우리나라 야구장의 문제라기보다 야구장의 다양한 특성 중 하나라고 봐야 합니다.
이 미묘한 차이는 마운드에 서서 타자와 포수를 보는 시선에 착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있을 때와 던지면서 시선이 앞으로 전진하고 눈높이가 내려가면서 공을 놓는 순간의 시선의 높이와 거리가 마운드 위에서 셋 포지션에 들어갔을 때와 또 달라집니다.
오버핸드 투수와 언더핸드 투수의 시점도 또 차이가 날 겁니다.
2. 포수 뒤 백스톱과 관중석의 차이
또 하나의 차이점은 야구장 뒤 관중석과 광고판 등이 달라짐에 따른 착시입니다.
과거 지어진 야구장은 1층에 기록실이 있어 벽으로 막힌 느낌이 듭니다.
최근에 지어진 팬 친화적 야구장은 광고판이 낮고 투수 시선 높이에 관중들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사진 관중석과 수직으로 서 있는 벽은 아무리 투수가 집중을 해도 느끼는 시야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포수 뒤 백스톱까지 거리도 구장마다 차이가 납니다. 이는 시각적으로 홈이 멀어 보이기도 하고 가까워 보이기도 합니다.
아래 80년대 초에 지어진 잠실야구장과 2019년 개장한 최신 야구장 창원NC파크의 중계화면 비교를 보시면 차이가 꽤 납니다. 포수 뒤 광고판과 관중석 등의 환경도 다르고 설치된 카메라의 위치와 높이도 다른 걸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실제 야구장에 서서 보면 마운드에선 홈이 멀게 느껴지고 타석에 서면 마운드가 가깝게 느껴진다는 것 아시나요? 즉 내려다볼 때는 멀어 보이고 올려다볼 때는 가깝게 느낍니다.
사람은 바라보는 피사체의 높이가 높으면 크게 느끼고 낮으면 작게 느낍니다. 같은 물체가 커 보이면 가깝게 느끼고 작으면 멀게 느끼게 됩니다. (아래 '야구의 심리학' 중 참고)
이는 투수가 느끼는 시선에도 차이가 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3. 투수판을 밟는 위치와 팔 각도, 투구 궤적의 차이
투수는 보통 투수판의 좌우 끝 중 어느 한쪽을 밟고 던집니다.
이렇게 되면 스트라이크존을 공략할 때 대각선으로 던지거나 존 끝을 공략하기 쉬워집니다.
게다가 변화구를 던지기 때문에 휘어지면서 들어옵니다. 타자 입장에선 비슷하게 보여도 공이 날아오는 도중에 스윙을 해야 하기 때문에 들어오는 궤적을 끝까지 볼 수 없습니다.
스윙을 마치고 포수를 돌아봤을 때 완전히 빠지면 스트라이크존도 빠져나간 공이라고 판단하는 건 사람이라면 당연한 반응입니다.
특히 백도어로 들어오거나 바깥쪽 낮게 휘어지면서 빠져나갈 경우 더더욱 그렇습니다.
KBO 홈페이지의 설명에 따르면 위아래는 홈플레이트 중간과 끝 부분을 모두 통과해야 스트라이크입니다. 그런데 투수가 투구한 공은 중력 때문에 홈플레이트를 지나며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높은 존은 가운데를 통과하면 뒤쪽은 자연히 통과하게 됩니다. 하지만 낮은 존은 가운데를 걸쳤지만 뒤쪽은 걸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좌우는 한 번만 스치면 스트라이크입니다.
게다가 포수는 홈플레이트 뒤에 일정 거리를 두고 공을 잡습니다. 편차가 더 커지죠. 포수가 교묘하게 볼을 스트라이크처럼 잡는 것을 그동안 일명 '미트질' 요즘은 '프레이밍'이라고 불렀습니다. 심판도 사람인지라 몇 번은 포수의 프레이밍에 착각을 일으키도 합니다. 최근 미국에선 이를 수치로 확인해서 포수의 프레이밍 능력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기계가 판정하면 프레이밍 능력은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투수 입장에서도 높낮이의 경우 홈플레이트의 중간과 끝 모두를 통과해야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는데 마운드 위에서 내려다보는 공의 궤적과 실제 궤적에서 차이가 발생합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내려다보면 같은 시선 높이보다 높이 측정에서 오차가 나는 것이 우리 눈의 특징입니다.
투수판의 1루 쪽을 밟고 던지는 왼손투수라면 스트라이크존을 정면이 아니라 약간 비스듬하게 보게 됩니다.
반면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고 카메라의 위치가 정가운데가 아니라도 보정을 통해 육면체의 공간을 통과하는지 여부를 판정하기 때문에 정확해질 수 있는 반면 투수는 바라보는 시선 방향이 정가운데가 아니기 때문에 오차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마치 중계 카메라가 정가운데가 아니기 때문에 시청자가 바라보는 스트라이크 존과 실제 스트라이크 존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과 같습니다.
4. 투수든 타자든 주심이든 감독이든 누구나 착시는 당연하다
“어떤 방법이든, 타자는 투구의 일부를 놓칠 수밖에 없다. 우리 두뇌는 일부 정보를 놓치게 되면, 시각.청각 등의 다른 감각을 이용하기보다는 응당 그럴 것이라는 최선의 추측으로 모자라는 정보를 채우는 경향이 있다."
- 마이크 스태들러 著 <야구의 심리학> 1장 타석의 심리학 p.51에서 발췌
야구처럼 150km/h를 넘나드는 작은 공을 던지고 때리는 종목에서 공의 움직임을 처음부터 끝까지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 누락된 정보는 오랫동안 익숙해진 추측(직관)으로 메우도록 사람은 진화해 왔습니다. 이 추측은 사람이 내리는 판정에도 적용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오랫동안 고도로 훈련이 되어 있는 선수라면 더더욱 이 ‘추측’이 일반인보다 더 뇌에 각인되었을 테고 이 추측과 실제의 차이가 기술의 발달로 인해 드러나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자신의 감각에 의지해서 하던 대로 할 것이냐 아니면 새로운 변화에 적응해서 살아남느냐의 선택을 강요받는 시대가 왔습니다.
마치 기후변화를 맞은 생태계에서 멸종이냐 적응하여 번성하느냐의 기로에 선 것처럼요.